여자 친구가 쓴 글입니다.

본격적으로 신혼집을 알아보기 전의 일이다. 조언도 얻고 시세도 알아 볼 겸 인터넷으로만 전세 매물을 알아보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말했다.

20대를 다 바친 대가인데, 이 돈으로 우리 방 한 칸도 얻지 못한다니 너무 허무해요.”

그는 환승 할인을 위해 30분 내에 볼일을 보고, 햄버거는 런치만 먹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고가의 브랜드 옷은 회사 단체 잠바가 거의 유일했고, 20만 원가량의 잠바 결제에 앞서선 심장이 떨린다며 백화점을 몇 바퀴나 도는, 그런 검소한 사람이다.

허무하다는 그의 말에 미안함이 앞섰다. 어려운 살림살이도 이유가 됐겠지만 낭비하고 소비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모은 걸 안다. 그리고 그 돈이 참으로 값지고 감사하다는 것 역시 안다.

그렇기에 더 미안했다. 2년 전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모두가 예상하듯 알뜰하게 모은 돈은 몇 천 만 원의 학비와 그에 상응하는 생활비로 다 나갔다. 이제 내 통장은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이 없다. 결혼 역시 부모님의 자비가 없었으면 추진될 수 없었다.

예전엔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관행이 약속이나 한 듯 철저하게 지켜졌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에 점점 남녀를 나누지 않고 함께 집을 마련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대학원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 집값에 보탬이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들처럼 대출을 시원하게 받기도 애매했다. 반백수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갚을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고, 그렇게 이자와 원금에 허덕이다 둘이 얼굴 붉혀야 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의 노동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집은 한계가 있었다. 그와 나는 생각의 시작부터 달랐다. “어차피 2년 정도 밖에 안 살 건데 무리하지 말고 대충 작은 데 구하자는 나와 우리가 2년이나 살 곳인데 너무 작고 허름한 곳은 안 된다는 그.

나의 예산에 맞춰 본 집들은 하나 같이 아주 낡았거나, 지하철역에서 많이 멀거나, 거실이 없거나, 싱크대에 누수현상이 있거나, 냉장고에 기대 텔레비전을 봐야 하거나, 빨래를 안방에 널어야 하는 뭐 그런 조건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대출을 받지 않는 선에서 그 정도 집은 금상첨화라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깨끗한 집, 좀 더 안전한 집을 원하는 남자친구에겐 어깨가 쳐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겁이 많은 나를 위해 보안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였기에 우리의 선택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지난 주말, 우리는 불광, 연신내, 응암, 증산 쪽을 돌아보았다. 해는 뜨겁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지만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왠지 오늘은 집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헌데 불광은 재개발에 묶여 께름칙했고, 연신내는 너무 번화가라 우리 두 사람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응암은 환승역에 있을 거 다 있으면서도 조용한 분위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애정이 가지 않았다. 헌데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남아 우연히 들르게 된 증산에서 나는 올레!!’를 외쳤다.

스트라이다

아니 뭐 이런 매력적인 동네가 다 있는지.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마주 선 불광천은 갑갑했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매일 이 길을 따라 오가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삼각형인 스트라이다를 타고 불광천을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남자친구는 말했다.

우리 이 동네로 결정해요. 스트라이다 타고 불광천을 달리고 싶어요. 우리 대출 받아요. 대출!”

주말이면 둘이 자전거를 타고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고, 여름밤에는 맥주 캔 하나씩 들고 나와 하루를 푸념할 수도 있는.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더군다나 적당히 버스도 있고, 적당히(, 이거는 적당히가 아니다.) 언덕도 있고, 무엇보다 대형 마트가 바로 코앞에 있지 않아 좋았다. 그래, 나는 증산에 반해버린 것이다.

아직 우리는 집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광천에 반해 나는 어렵게 양가에 조금씩 도움을 받기로 했다. 대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받기로 했다. 대출금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정해졌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우리는 증산역 어디쯤, 그 언덕 위에 아주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 손을 잡고 그 언덕을 내려와 출근과 등교를 하고 해가 넘어가는 저녁 다시 그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를 것이다.

그저 대출을 받지 않고 작은 집을 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그저 좋은 집을 얻기 위해 많은 대출을 떠안거나 끝으로 끝으로, 구석으로 구석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그냥 각자의 가치관과 추구하는 삶의 질에 맞춰 일정한 타협선을 보면 될 것이다.

나는 결국 조용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말 그대로 동네같은 동네에, 그리고 갑갑했던 나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켜버린 불광천에 반해 언덕도, 대출도 떠안고 가기로 했다. 이제 남은 건 집을 구하고, 알바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신혼집 구하기 프로젝트]4~5일에 한 번씩 발행될 예정입니다.

  1. 2013.06.23 01:48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선기자 2013.06.24 10:22 신고

    거기 딱 서! (언니닷.)

  3. BlogIcon TUMA 2013.08.28 17:57 신고

    저는 결혼은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지만, 부산에서 서울올라와 고시원에서 대학을 다녔던 처지라, 신혼집 구하기 글을 보면서 공감 많이 했어요.. 고시원 탈출하겠다고 보증금 500으로 월세방구하러 부동산 갔을때 보증금 500으로는 힘들다고, 지하나 반지하도 괜찮겠냐고 묻던 공인중개사 아저씨의 얼굴이 생각나네요 ㅠㅠ

  4. BlogIcon 소소하Lee 2014.07.04 11:15 신고

    정말 글을 읽다가 격하게 공감해서, 댓글남기려고 티스토리 몇 개월만에 접속했어요. 홍대/연남동/연희동 쪽에서 신혼집을 구하려고 하니 1억가지고 쾌적한 집은 절대 꿈도 못꾸겠더라구요. 누군가에겐 한 푼도 안쓰고 숨도 안 쉬고 몇 년을 모아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1억인데, 1억으로는 제대로 된 집 하나 못구한다니, 스스로 자괴감도 들고 삶이 허무해지기까지 했어요. 선기자님 부부처럼 제 남자친구와 저도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증산/새절 쪽에 집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고 있습니다. 그나마 거실이 있는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전히 1억은 껌값이네요 ㅠㅠ 아무튼.. 글을 읽으면서 제가 힐링이 된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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