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아들을 매우 사랑한단다.

#1

지난 2013년 여름의 일이다. 아내가 아이를 임신한 지 3개월쯤 됐을 때다.

우리 부부의 관심사는 아이의 성별이었다. 딸일까, 아들일까. 나 역시 많은 아빠들처럼 '딸바보'가 되고 싶었다. 아내도 딸을 바랐다.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 병원에 가는 길, 장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얼마 전 꾼 꿈의 해몽에 따르면, 아이가 아들일 거라고 하셨다. 철없는 사위는 "어머님 아니에요. 딸이에요"라고 우겼다.

장모님의 해몽에는 당신의 딸을 위한 마음이 담겼다. 난 장손이다. 내 부모님에게 아이는 첫 손주다. 노골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부모님은 내심 아들이길 바라셨다. 장모님은 당신의 딸이 아들을 낳아야, 시집살이가 좀 더 수월할 거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난 장모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 철없는 사위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병원에 갈 때마다 초조했지만, 그날도 의사선생님은 별 말씀이 없었다. '오늘도 안 알려주려는 모양이네.' 의사선생님은 진료를 시작했다. 모니터에 아내 뱃속의 아이 모습이 보였다. 의사선생님은 "아이가 잘 있네요. 이건 고추고..."라고 말했다. 무방비상태에서 큰 충격파를 맞았다. ', 딸바보가 될 수 없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내는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아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난 아내를 토닥였다. 아들도 잘 키우면 딸 부럽지 않을 거라고. 아들이 나를 안 닮았다면, 엄마한테 잘할거라고 했다. 나는 사춘기 이후부터 집에서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엄마한테 살가운 표현도 잘 못했다. 아이를 낳고 난 뒤에야 엄마가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깨달았다.

#2

아이가 태어난 지 어느덧 16개월. 아기였을 때는 아들이나 딸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밖에 나가면 "딸이냐"고 묻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사내아이답다. 참 활동적이다. , 이건 너무 순화한 말이다. 경상도 처가에서는 "나댄다"고 하고, 전라도 본가에서는 "참 부잡스럽다"고 한다.

아이는 사고뭉치다. 얼마 전에는 쌀통에서 쌀을 다 꺼내 온 집안에 흩뿌렸다. 마우스를 베란다 밖으로 던져, 산산조각 내기도 했다. 아이는 TV를 쓰러트리려는 시도를 종종 한다. 내가 막지 않았다면, ... 책상이나 의자에 어떻게든 올라가는 아이는 넘어지고 부딪혀 참 많이 울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내아이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들 없으면 못사는 아들바보가 됐다. 아이는 낯을 조금 가리지만 그것도 잠시다. 잘해주는 사람한테 잘 웃고 애교를 부린다. 어린이집에서는 귀염둥이로 통한다. 또 신나는 음악이 들리면, 리듬에 몸을 얹고 춤을 춘다. 이 모습에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우리 집안의 활력소다. 아이가 없는 세상을 이제는 상상할 수 없다.

매일 밤 어린이집 대화장을 보는 게 낙이다. 그날 하루 아이의 모습을 기록한 선생님의 짧은 글에 울고 웃는다. 특히, 아이에게 호기심과 관찰력이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마종하 시인의 시 <딸을 위한 시>처럼 아이가 관찰을 잘 하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이 이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딸을 위한 시 - 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 마종하 시인의 시집 <활주로가 있는 밤>(문학동네, 1999)

다시 육아일기를 씁니다.

외로움은 가장 늦게 가르쳐줄게.

오후 6. 초조하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도로는 꽉 막혀 있고, 내가 탄 차는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오후 630. 도로가 막히지 않아도, 제 시간에 도착하기 빠듯한 시간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늦을 게 뻔하다.

오후 7. 늦었다. 어린이집이 문을 닫는 오후 730분까지 도저히 도착할 수 없다. 체념하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잘 데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라고 했다. 그 말에 괜히 더 미안하고 속상했다. 그리고 혼자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오후 740. 지하철에서 내린 뒤, 헐레벌떡 뛰어 어린이집에 닿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슬쩍 신발장을 보니, 아이 신발밖에 없다. 아이는 최소 30분 동안 친구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선생님과 단둘이 있었을 것이다.

곧 선생님이 나왔다. 아이는 선생님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아이가 이 시간에 자는 건 처음 봤다. 아이는 왜 이렇게 빨리 잠들었을까.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려고 했을까. 아이를 안으니, 아이가 눈을 떴다. 아빠임을 확인하더니 잠에서 깨서 싱글벙글 웃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아이에게 미안해. 미안해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얼마 전 아내는 일을 구했다. 아내가 면접에서 눈물을 쏟던 날을 기억한다. 결국 아내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아내도 나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곧 현실적인 고민 앞에 섰다. 아침 일찍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녁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내는 평일 이틀은 퇴근 후에 학교에 간다. 늦은 밤 일과 공부를 마무리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는 내가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 기자라는 직업은 정시 퇴근이 쉽지 않다. 그날도 경기도 성남에 취재를 갔다가, 시간 맞춰 서울 서대문구로 돌아와야 했다. 급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보니, 만족스럽지 못한 기사를 썼다. 그렇다고 어린이집에 제 시간에 도착한 것도 아니다. 나와 아이 모두에게 참 미안한 하루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어쩌지?’ 아내는 새로 들어간 회사에 하루 쉬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도 급한 취재가 있다면, 취소하는 건 쉽지 않다. 아이를 대신 맡아줄 사람은 없다. 제발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우리 부부는 진정한 육아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풀 수 없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처럼, 막막함이 앞선다.

어린이집에 홀로 남은 아이를 보면서, 아이에게 외로움은 최대한 늦게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년 시절, 부모님은 항상 일하셨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왔 , 내겐 친구가 없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직도 휑한 집안에 외롭게 앉아 있는 어린 내 모습이 생각난다. 아이가 기형도 시인의 <엄마생각>이라는 시를 이해하는 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c)

대통령님.

안녕하신지요? 혼을 다해 국정 운영에 전념하고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특히 최근 대통령님이 역점을 기울이고 있는 여러 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해 "걱정으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 말씀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돌쟁이 아들을 둔 아빠입니다. 얼마 전부터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는 계속 울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친구들과 잘 놀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이가 얼마나 대견해 보이던지요. 정부가 어린이집 비용을 보조해주는 덕분에 저와 아내는 큰 부담 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말씀처럼, 진실한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일을 한다면 좋은 정책이 많아지겠지요. 저 역시 진실한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님은 지난달 22일 국무회의에서 어떤 사람이 진실한 사람인지 말씀하셨지요.

"옛말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한결같은 이가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취하고 얻기 위해서 마음을 바꾸지 말고,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반대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한결같지 않은 사람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정은 삐거덕거릴 겁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느냐고요? 바로 대통령님입니다.

대통령님, 누리과정을 잘 알고 있으시죠?

누리과정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23월 처음 시행됐습니다. 20115월 김황식 국무총리는 누리과정(당시 만 5세 공통과정)을 도입하면서 "어린이들의 교육과 보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보다 강화하려는 정부의 시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당시 대통령님은 '누리과정 강화 공약'을 내놓으며 "국가가 보육을 책임지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누리과정은 2013년부터 만 3~4세로 확대하기로 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님의 대선공약집 첫머리에 '국민행복 10대 공약'이 나옵니다. '확실한 국가책임 보육', '5세까지 국가 무상보육 및 무상유아교육'이 눈에 들어옵니다. 272쪽을 볼까요? 예산 미반영으로 인한 헛공약 우려 탓인지 '3~5세 누리과정 지원 비용 증액', '국가책임 보육 및 유아교육을 위한 예산의 안정적 확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해 대선을 사흘 앞둔 1216, 대통령님은 TV 토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0세에서 5세 보육은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님은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아이 키우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0131, 대통령님은 전국광역시도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보육사업과 같은 전국 단위로 이뤄지는 사업은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오히려 누리과정 확대에 따른 막대한 예산 부담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한결같은 이가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씀을 적용하면, 대통령님은 진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2013년 교육부는 이듬해 예산안을 짜면서, 16000억 원의 누리과정 예산을 반영했습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이를 모두 삭감했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예산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시도교육청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공약인 누리과정을 시행하느라 더 큰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지난해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선 공약 파기'라는 비판이 커지자, 그해 10월 최경환 경제부총리(기획재정부 장관)와 황우여 사회부총리(교육부 장관)가 나서 '누리과정은 시도교육청의 책임이고, 국고 지원은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내년 총선에 나가기 위해 부총리 자리를 던진 두 분에 대해 대통령님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더군요.

적반하장입니다

정부가 누리과정을 도입·확대하고 생색을 낸 것을 감안하면, 누리과정이 시도교육청의 책임이라는 말은 시도교육청 입장에서는 황당할 노릇입니다. 이런 일은 조금은 복잡한 제도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다 보고 받고, 알고 계신 내용이겠지요.

2011년 누리과정 도입 발표 때, 이명박 정부는 예산 부담을 일반 정부 예산이 아닌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 떠넘겼습니다. 교부금은 정부가 세금을 걷어 시도교육청에 내려보내는 돈으로, 시도교육청 예산의 70%를 차지합니다.

교부금은 법률에 따라 내국세 총액의 20.27%로 정해져 있습니다. 시도교육청 예산이 안 그래도 빠듯한데, 누리과정 예산까지 떠맡으라고 하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정부는 경제가 활성화되면 세금도 더 걷히고 교부금도 많아질 것이라며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정부 말과는 달리 교부금은 뒷걸음질 쳤습니다. 정부는 2015년 전국 시도교육청에 494000억 원을 교부금으로 내려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394000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시도교육청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지금까지는 빚을 내거나 학교 시설 개선 예산을 줄이는 등 시도교육청의 임시방편으로, 보육 대란은 가까스로 피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년 전국 어린이집 누리과정에 필요한 예산은 약 21000억 원. 국회는 지난달 본회의에서 누리과정을 우회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예비비 3000억 원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를 고려해도 18000억 원이 부족합니다.

보육 대란이 불가피합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수많은 부모는 가슴을 졸이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처형과 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대통령님, 지난 대선 때 한 표를 호소하며 많은 아이 엄마 아빠를 만났을 겁니다. 진실한 사람은 약속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고 보육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대통령님이 이를 외면한다면,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이 아빠의 한 사람으로서 호소 드렸습니다.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한 달 전, 제가 <오마이뉴스>에 쓴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첫 번째

지난 토요일 늦은 밤 아이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금요일부터 아이의 체온은 40도를 넘나들었다. 돌 이후 아이는 종종 아팠고, 그럴 때마다 아이 몸에서 열이 났다. 체온이 40도를 웃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변에서 고열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우리 부부는 가슴을 졸였다. 해열제를 먹였지만, 열이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는 크게 걱정했다. 이틀 내내 아이의 체온은 39도가 기본이었다. 그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끙끙 앓는 아이 소리에 체온계를 아이 귀에 꽂으니, 40.3. 해열제를 먹인 지 한 시간이 흘렀지만 열은 그대로였다. 결국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기로 했다. 서울역 앞에 응급실을 운영하는 아동병원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차를 끌고 그곳으로 갔다. 가는 도중 아이의 열은 조금 내려갔지만, 그래도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아동병원 앞에 다다랐다. 병원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지난해 3월부터 응급실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우리를 맞았다. 허탈했다. 그래도 아이의 열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던 터라, 운전대를 집으로 돌렸다.

두 번째

짧은 밤이 지난 아침, 아이의 이마는 다시 펄펄 끓었다. 체온계 숫자는 40도를 넘었다. 해열제를 썼지만, 소용이 없는 듯 했다. 다시 서울역 앞 아동병원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도착해 진료를 받았다. 아이의 열은 다소 떨어졌지만, 이왕 온 거 정확한 처방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감이 유행한다고 해서 독감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은 콧물약과 해열제 등을 처방해주면서 며칠만 먹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 했다. 아이는 아직 열이 있었지만, 조금 떨어졌다. 의사 선생님이 금방 나을 거라고 하니, 기분 좋게 집으로 왔다.

세 번째

집에 오자마자, 아이는 다시 고열에 시달렸다. 다시 40도를 넘겼다. 해열제를 썼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열이 조금 떨어지겠지만, '혹시 안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 마음이 우리 부부를 힘들게 했다.

돌이켜보니, 며칠 동안 각종 약과 해열제를 아이 몸에 들이붓다시피 먹여도 아이의 체온은 38.5도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수액을 맞든지 병원에 입원을 시키든지 하자고 했다. 다시 서울역 앞 아동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진료하지 않는다고 했다. 진료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1시간 3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진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이 정도 가지고 입원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사정을 말하니, 수액을 맞고 가라고 했다.

주사실에서 간호사가 아이의 팔과 다리에 주사 놓을 곳을 찾았다. 고열에 시달렸던 아이인지라 혈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는 병원이 떠나가라 꺼이꺼이 울었다. 아내는 아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아이의 몸을 꼭 잡았다. 아이는 발버둥 쳤고, 아내는 아이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내는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아이 체온은 수액과 해열제의 힘으로 아픈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38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자기 왜 울었어요?"

아내는 내 질문에 민망한 듯 눈을 흘기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1시간 넘게 수액을 맞은 아이는 제법 낮아진 체온 덕에 팔팔하게 움직였고, 그날 저녁 밥도 먹었다.

아이는 그 뒤로도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렸다. 다행히 더는 40도는 찍지 않았다.

덧붙임1 : 다 나았다고 생각했을 때쯤, 아이는 기침을 시작했다. 병원에 가보니 후두염이란다. 약을 먹고 나을 때까지 5~6일가량 걸린다고 한다. 아이는 다시 보채기 시작했다. 짜증을 내고 밥을 먹지 않았다. 밤에 기침을 하다 잠을 깨기 일쑤였다. 아이는 엄마만 찾는다. 아내의 손목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에게 언제쯤 평화가 찾아올까

덧붙임2 :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날카로워진다. 아내와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얼마 전 친구 결혼식에서 축시로 함민복 시인의 시 <부부>를 읽었다. 이 시는 새신랑 친구뿐만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필요한 시이기도 하다.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하고 걸어야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아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 놓아서는 안된다

걸음의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함민복 시인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어제는 아이의 돌이었다.

돌잔치는 주말 가족과 밥 먹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첫 생일은 새로울 게 없는 하루였다. 휴가를 내, 아이와 신나게 놀자는 생각만 해뒀다. 케이크를 사 촛불을 같이 끄는 것도 특별한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작 케이크를 사지도 못했다. 아이와 잘 놀지도 못했다. 아이가 무척 아팠기 때문이다.

아이는 며칠 전 갑자기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39.5. 이마에 쿨 시트를 붙이고 해열제를 먹여 체온을 조금 떨어뜨려 놓아도, 아이는 금세 뜨거워졌다. 먹은 것들을 몇 번이나 게웠다. 새벽 내내 우리 부부는 끙끙거리는 아이 옆을 지켰다. 특히, 아내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아이를 안고 잠을 청했다.

"아이고, 아파"

병원에 가보니, 편도선이 부어 열이 났다고 했다. 항생제를 받아왔다. 항생제 남용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항생제를 최대한 쓰지 않기로 했다. 지난달 아이가 감기에 걸렸을 때도 항생제를 쓰지 않았다. 아이는 낫는 데 다소 오래 걸렸고, 아이도 우리 부부도 고생했다. 그렇지만 아이는 앞으로 감기에 더욱 강해지리라.

아이가 많이 아프니, 그 원칙은 무너졌다. 몇 시간 간격으로 아이 체온이 39도를 넘어선다면, 항생제든 뭐든 빨리 먹여 아이가 낫도록 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편도선이 붓다보니 아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평소 아이가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울 때는 배고플 때다. 생존 본능 때문일 거다. 분유가 가득 든 젖병만 봐도 달려드는 아이다.

하지만 아픈 아이는 젖병을 한번 빨더니, 이내 던졌다. 몇 번이고 아이 앞에 젖병을 들이밀었지만, 아이는 손으로 밀쳐내기 바빴다. 배고파서 울면서도 말이다. 분유를 마시면 목이 아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배고프니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다고 분유를 먹지도 않으니,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제 내가 출근한 사이, 아이와 아내는 지옥을 경험했다. 아이는 배고프다보니 온갖 짜증을 다 부렸다. 계속 울었고, 계속 아내에게 안겨 있으려고 했다. 퇴근하니, 아내의 허리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제 아침 아이의 상태는 다소 괜찮았지만, 여전히 먹는 걸 힘들어했다. 다시 병원에 갔다. 편도선 염증은 그대로였고, 입안도 헐었단다. 설상가상이다. 나는 피곤하면 입안이 자주 헌다. 아이가 나를 닮았나보다. 괜히 미안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뭘 먹을 수 있도록 우리 부부는 온갖 묘수를 짜냈다. 밥에 김을 쌌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은 아이에게 신세계다. 젓가락으로 갖다 대니 아이가 입을 열고 먹는다. 그렇지! 한 번, 두 번, . 아이는 두 젓가락만 먹고 짜증나는 표정으로 얼굴을 휙 돌렸다. 아이가 밥으로 장난치기에 그대로 뒀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먹지 않을까. 30분 후, 아이는 방바닥에 밥을 처발처발했다.

간혹 운수 좋은 밥알이 아이의 입속으로 들어갔지만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아내는 튀밥을 가져와 아이 앞에 뿌렸다. 고소한 튀밥이라도 몇 개 주워 먹어주길 바라는 엄마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장난만 쳤다. 우리 부부는 청소하느라 진땀만 흘렸다.

아이는 지난주 월요일부터 어린이집에 다닌다. 어린이집에 있는 2시간 동안, 아이는 계속 운다고 했다. 같이 들어간 친구들은 잘 먹고 잘 자는데, 아이만 운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적응기간이 꽤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엄마 품을 떠나 어린이집에 가는 게 극심한 스트레스였나 보다. 그래서 면역력이 떨어져서 아팠나 보다.

어린이집에 조금만 더 늦게 보낼 걸. 미안해.’

생일 케이크도 못 받고 온종일 우는 아이가 너무 안쓰럽다. 빨리 나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돌잔치 때 건강한 모습으로 두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모와 고모할머니를 만나야지. 네가 한 번 웃으면 온 집안은 웃음바다가 되고, 네가 아프면 다들 축 처질거야. 얼른 건강해지렴.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아플 때 엄마만 찾지 말고 아빠도 찾았으면 좋겠어. 아빠가 안으면 자지러지게 우는 네 모습에 상처받았단다. 너를 향한 아빠의 마음은 한결 같단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농담 / 유하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 영화감독 유하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 1991)

아이는 머리맡에 어린이집 가방을 두고 쿨쿨 자고 있다.

며칠 전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OOO 어린이집이에요. 한 자리가 났어요."

아내는 놀라 "?"라고 외쳤다. 얼마 전, 우리 부부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집 주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도 대기자가 많아 보낼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걸려온 어린이집 전화였다. 며칠 뒤부터 0세 반 한 반을 더 만든다고 했다. 날짜가 급박해서인지 우리 앞 순위의 대기자들은 모두 거절한 것 같았다. 민간 어린이집이었지만, 기약없이 국공립 어린이집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내는 온 집안에 '비상'을 걸었다. 이 기쁜 소식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렸다. 이제 아내도 육아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할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집에 갈 아이가 측은했지만, 한편으로는 육아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될 아내의 모습에 흐뭇했다.

그날 집에 가서 집 전체를 놀이터 삼아 곳곳을 기어 다니는 아이를 붙들고 한참 얘기했다.

"너 어린이집에서 잘할 수 있겠어? 너 태어나서 1년 만에 첫 사회생활 하는 거야. 친구들이랑 잘 지낼 수 있겠어? 아빠는 괜히 마음이 짠해..."

아이는 그저 실실 웃는다. 그러곤 내 품을 벗어나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상담날까지 우리 부부는 몇 번이나 길을 돌아서 그 어린이집 앞을 지나갔다. 우리 아이의 첫 어린이집은 겉보기엔 평범했다. 어떤 곳일까. 어떤 선생님들이 있을까.


****


이제 서고 쪼그려 앉을 수 있을 만큼 컸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도 너무 연약한 존재다.

그날이 왔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에 갔다. 어린이집은 집에서 5분 거리다. 그런데 그 5분이 참 길었다.

원장님과 마주 앉았다. 아내가 원장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아이를 품은 나는 원장실 곳곳을 살폈다. 벽에는 온갖 알림 사항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책장까지 모두 살폈다. 곧 원장님은 우리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우리 아이와 함께할 아이들이 있었다. 방은 깔끔했지만, 전체적으로 낡아보였다. 장난감이나 시설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도 색이 많이 바랬다. 방 온도가 높지 않아 아이가 쌀쌀할 것 같았다.

괜히 마음이 짠했다. 아내와 내가 집에서 아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는데, 이런 낡은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니. 그 생각을 하니 콧날이 시큰거렸다. 좋은 곳에 보내지 못해 아이한테 미안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차버리면, 아이를 언제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동안 아내는 더욱 지치겠지. 그럼에도 말을 해야 했다. 짧은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솔직히 아내에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내는 처형과 친구에게 전화를 돌렸다. 여러 의견을 듣고난 후 아내는 선생님들을 믿고 한번 보내보자고 했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그 얘기를 했었다. “우리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하지 않게 하는 게 원칙이라고. 이렇게 근무시간이 보장되면 선생님도 아이에게 더 잘 대해줄 수 있겠지. 부디 아이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를. 고민 끝에 가까스로 아내에게 말했다. 

그래요. 어린이집에 보냅시다. 

글을 쓰고 있는 새벽 잠든 아이를 보니, 피천득의 기다림이 떠올랐다. 나도 어느새 아이를 작은 학교에 보내는 아빠가 됐다.


기다림 피천득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는 기다렸다


이때만 해도 분위기 좋았다.


분명 아이를 데려가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 아이를 데려가지 않는다. 아이를 데려갈 이유가 없다는 게 정확한 말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를 안고 이곳의 문을 열었을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닿은 곳은 건강검진센터다. 1년에 한 번 아내와 함께 건강검진을 받는다. 아이를 낳은 뒤 처음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아이를 맡길 때가 없어, 아이를 데려갔다. 며칠 전의 일이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건강검진을 받는 데 1시간이면 충분했다. 아내와 번갈아가면서 아이를 보면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구석진 소파에 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 1시간 만에 건강검진을 마치면, 아이가 똥을 싸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 건강검진센터에 기저귀를 교환할 장소가 없어서, 아이가 똥을 싸면 대책이 없다.

건강검진센터 문을 열었을 때, 당황했다. 좁은 센터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건 처음이었다. 구석진 곳에도 빈 소파는 없었다. 서성이며 검사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메르스 때문에 다른 회사들도 우리 회사처럼 하반기에 직원 건강검진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를 안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간호사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서야 호명됐다. 1~2분 검사를 받고, 수십 분 기다리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아내가 수면내시경을 받을 때, 보채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센터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마지막 복부초음파 검사만 남겨뒀을 때는 건강검진 4시간째였다. 곧 돌을 맞는 사내아이를 몇 시간 안고 서 있는 건 힘들지만, 버틸만했다. 나는 괜찮지만 아이가 힘들어했다. 큰 소리로 칭얼거렸고, 아내를 찾았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초음파 검사를 받기까지 1시간이 넘는 대기 시간 동안 난 안절부절못했다.

모든 검사가 끝날 때쯤 회사 선배를 만났다. “아이를 데리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5시간이 넘는 건강검진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시간 동안 똥 안 싸서 고마워. 넌 효자야."

아이는 집에 가서 고약한 냄새의 똥을 쌌다.


****


아이는 잘 때 가장 귀엽다아이는 잘 때 가장 귀엽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라고 한다. 우리 부부 또한 간절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다. 아내는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저녁과 주말에는 한 대학 교육원에서 공부한다. 맞벌이는 아니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부부는 집 주변 온갖 어린이집에 입소 신청을 했다. 물론, 아이가 태아일 때부터. 현재 민간어린이집의 경우, 우리 아이 앞에 수십 명의 아이가 대기하고 있다. 인기 많은 국공립 어린이집에서는 세 자릿수 대기번호를 받았다.

아내의 한숨이 늘어간다. 집에서 홀로 아이를 11개월째 키우는 아내의 몸은 이제 삐꺼덕댄다. 아이를 잠시만 안아도 팔이 아프다. 팔을 쓰지 않아야 괜찮겠지만, 그럴 수야 있나. 오늘도 내가 저녁 약속 때문에 늦어, 아내 혼자 종일 아이를 돌봤다.

우리 부부와 아이에게 고슴도치 사랑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이정하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아이야, 얼른 어린이집 가자꾸나.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도 다치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었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행복할 수 있었네.

 

- 이정하 시인의 시 고슴도치 사랑중에서



최대한 아프지 말고 크렴.


얼마 전, 아이가 아팠다. 그날 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를 재웠다. 늦은 밤 아이가 잠자는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들어갔다. 잠시 후 "체온계 좀 가져와요"라는 아내의 다급한 말이 들렸다. 아이의 체온을 쟀다.

39. 아이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고열은 아이에게 가장 위험한 신체의 변화다. 하지만 많은 육아 선배들은 웬만한 고열로는 병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집에서 해열제로 열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도, 해열제 처방을 받는다고 했다. 오히려 피를 뽑다가 아이가 더 힘들어한다고도 했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아이가 아파도 침착하게 집에서 해결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고열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날 밤 아이는 그날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그 조그마한 입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토사물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이도 놀랐는지 울고 또 울었다. 토사물이 묻은 이불과 아이의 옷을 치웠다. 아이는 새벽에만 몇 번을 더 토했다. 아이의 이마에 쿨시트를 붙이고 억지로 해열제를 먹였다.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당장 택시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아이의 열은 조금 떨어졌다. 대신 콧물이 아이의 코를 가득 메웠다. 숨쉬기 어려워서인지, 새벽 내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댔다. 우리 부부 역시 잠을 설쳤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우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나마 열이 조금 내린 것에 안도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해열제 덕에 떨어지던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보채는 아이를 안으니 온몸이 다시 불덩이가 됐다. 아이는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히고 이불을 갈았다. 새 이불에다 아이는 또 토했다.

새벽 어스름, 우리 부부는 선택해야 했다. 응급실에 갈지 아니면 좀 더 지켜볼지. 나는 응급실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해열제를 다시 먹이고 아이를 안았다. 징징거리는 아이를 안고 집 구석구석으로 발길을 옮겼다.

곧 아침이 밝았다. 아이는 새벽보다는 나아 보였다. 퉁퉁 부은 붉은 얼굴로 웃기도 했다. ‘이 순둥아,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니?’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소아청소년과 병원이 집 근처에 있었다. 회사에는 "아이가 아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의 열은 더 오르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아이의 증상이 수족구와 장염 초기 증상일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감기 증상만 보였다. 약을 먹였더니 열은 많이 떨어졌다. 미열이 있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콧물이었다. 코를 막은 콧물에 아이는 분유도 먹지 못했다. 이른바 뻥코로 코를 뚫어줘도 그 순간뿐이었다. 아이와 우리 부부 모두 뜬눈으로 밤을 보낸 것 같았다. 아이는 아픈 지 열흘 정도 됐을 때야 비로소 제법 괜찮아졌다.

누군가는 그랬다.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몇 번 가봐야 아이를 키우는 거"라고. 최근에 만난 한 육아 선배는 "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면, 아이는 몇 달 동안 계속 아프다"고 했다. 또 다른 육아 선배는 아이가 수족구와 같은 전염병에 여러 차례 걸려 꽤나 고생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아이는 잘 자라줬다. 이번에 아픈 거 말고는 지금까지 크게 아픈 적이 없었다. 그렇게 건강했던 아이가 아프니, 안타까웠고 어떨 때는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더 많이 더 자주 아플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응급실에 뛰어갈 날도 꽤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 있을 것이다. 장석주 시인의 저 유명한 시 <대추 한 알>처럼 아이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가 돼 있을 것이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 장석주 시인의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중에서

아내가 쓴 글입니다.


언젠가 아이의 발톱을 자르는 모습을, 남편이 찍었다.


나는 여름부터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하루는 늘 취업사이트 확인으로 끝났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아깝게 예비 합격자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낙방의 경험이 거듭될수록 마음의 상처도 커졌다.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는 구직자의 입장에서, 낙방의 원인은 나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부족할까. 나는 무엇을 더 채우고 준비해야 할까. 나의 경력단절이 문제일까. 내 나이가 너무 많나.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낙방의 상처가 아니었다. 원서를 낼 곳이 없다는 거였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눈높이를 낮춰야 하나생각했지만, 문제는 눈높이가 아니었다.

월급이 많은 곳에 지원할 땐 생활비에 학비까지 충당하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지라는 이유를 댔고, 월급이 적은 곳에 지원할 땐 경력 단절도 있고, 저녁엔 학교 문제로 야근이 불가하니 이 정도도 괜찮지 뭐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남편은 아직 실망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느 날 친한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에서 구인공고가 올라왔어요. 언니가 내보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내키지 않았다. 또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다. 잠시 쉼이 필요하다고 내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보내버릴 수 없는 기회였다. 이력서를 내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력서를 냈고, 나는 오늘 그곳에 면접을 봤다. ‘왠지 안 될 것 같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나의 발길을 마구 잡아끌었지만 면접 경험이라도 한 번 더 쌓자는 생각에 그곳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 내게 일어날 엄청난 일을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좌절감에 빠져있던 나는 긴장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묻는 말에 나의 생각만 잘 말하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

 

면접은 지원자 3명이 함께 그룹인터뷰로 진행됐다. 첫 질문은 자기소개와 지원동기였다. 첫 번째 지원자의 대답이 끝난 뒤 나는 입을 떼기 시작했다. 자기소개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헌데 지원동기를 말하며아뿔싸.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미쳤나. 정신 차려. 주책맞게 왜 이래.’ 헌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죄송해요. 제가 요즘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결혼하고 아이 낳고경력단절이

무슨 말을 해대는 거야!!!’ 나도 여배우처럼 예쁘게 눈물을 흘리고 싶었으나, 나는 어느 샌가 꺼억~ 꺼억~ 거리고 있었다. (젠장) 이미 아이라인은 번졌고, 립스틱은 다 빨아먹었다.

모두가 당황했지만 내가 제일 당황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심사위원들은 요즘 취업난이 심해서 이런 경우 종종 있다며 나를 위로하였지만, 주책맞게도 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함께 면접을 보는 지원자가 힘내라며 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깽판도 이런 깽판이 없었다. “왜 하필 이곳에 지원했냐는 질문엔 일을 하고 싶어 지원했다며 너무나 명확하지만 단순한 이유를 댔다. ‘어차피 망한 거 그냥 있는 그대로 하자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두 지원자는 열심히 자신들을 어필했다. 나는 너무 울어서인지 머리가 멍했다. 조금 진정되는 가싶다가도 혼자 울컥하고, 울컥하다가도 질문을 하면 대답은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면접은 1시간 20분 만에 끝이 났다. 함께 면접을 봤던 지원자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너무 창피했다. 남편과 친한 동생은 마음 편하게 하고 오라고 했지 누가 깽판치고 오라고 했냐진상 중에 개진상이라고 비웃었다. 그 비웃음이 위로가 됐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더 부끄러워진다. 나는 충분히 쥐구멍을 찾아 지구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한 가지 참으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죽도록 쪽팔리는데, 마음은 가볍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하나하나 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내가 처한 환경을 다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구직활동이 짧을 뿐이지 나는 이미 2년째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전해왔으며, 기대하고 좌절해왔다. 요 근래 다른 일들과 함께 구직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힘들었던 마음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면접 중에 터진 것이다.

한번쯤 그 마음을 털어낼 기회가 필요했던 것 같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터진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지금도 창피하다. 정말... ‘개쪽팔린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마음이 가볍다. 다시 구직활동에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 같다.

오늘 나로 인해 당황했을 면접관들과, 면접에 방해를 받았을 지원자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여전히 나는 창피하고,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날리고 있지만, 오늘 나의 진상짓을 들은 친한 동생의 우리 언니가 돌아왔다는 말처럼 나는 다시 나로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허나, 진상짓은 이걸로 끝내자.


****

 

남편은 힘을 내라면서 저 유명한 백석의 시를 읽어줬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도연명'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문장> 19414월호, <백석평전>(다산책방, 2014)에서 재인용 

아이는 잘 때가 가장 귀엽다

오늘 아이한테 상처받았다.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일요일 오후, 아내는 약속이 있어 나갔다. 나는 아이와 함께 일요일 한나절을 보냈다. 도서관에 갔는데, 아이는 아빠한테 잘 매달려 있었다. 보채지 않았다. 역시 아이와 나는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집에 와서도 아이와 한 시간 넘게 잘 놀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는 칭얼대기 시작했다. 배고픈 것 같아서 이유식을 떠먹여 봤지만,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비비는 걸 보니 졸린 모양이다.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이렇게 10~20분 안고 있으면, 보통 아이는 잔다. 졸린 표정의 아이는 끝내 잠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칭얼거렸다. 시간이 지나자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악을 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이를 어르고 달랜 지 30분이 넘었지만, 그럴수록 아이를 더 악을 썼다.

집 바깥으로 나갔다. 공기가 차지만, 아이는 바깥 공기를 마시면 진정하리라. 하지만 아이는 동네가 떠나가라 악을 썼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골목 이곳저곳으로 발걸음을 재빨리 옮겨야 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혹시 아이가 아픈 것 아닐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을 깨면서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가 약속이 있어 나간 뒤에는, 아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힘으로 아이를 돌보고 싶었고, 아내의 자유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서 아내에게 미안했다.

통화연결음이 들렸다. 그 순간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아이가 울어서, 전화했는데", "아이가 안 우는데요?" 그렇게 짧은 통화를 끝냈다. 그런데 아이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다시 전화했다. 어라, 아이는 다시 울음을 그쳤다.

몇 번이나 반복됐다. 아이는 통화연결음과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금세 울음을 그쳤다. 반대로 전화를 끊으면, 아이는 울었다. 아내는 약속을 파하고 지하철을 탔다.

고마워. 카카오 친구들!

그런데 아내와 이런 식으로 계속 통화할 수 없는 노릇이다. 휴대전화로 여러 음악을 들려줬는데, 효과가 없었다. 아이는 통화연결음과 아내 목소리에만 안정을 찾는 듯했다. 통화연결음과 비슷한 소리를 찾다가, 불현듯 프렌즈팝이 생각났다. 실행했더니, 아이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이내 꿈나라로 갔다.

아빠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잠깐의 프렌즈팝 소리에 잠이 들었다. 허탈하고,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스스로를 '시팔이'이라 부르는 하상욱 시인은 시집 <서울 시>(2013, 중앙북스)에 이렇게 썼다.


니가

문제일가


내가

문제일까

 

- 하상욱 단편 시집 신용카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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