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처조카 유라·예린이를 사진에 담았다.

우리 부부는 기념사진에 무덤덤하다. 결혼할 때 다들 찍는 스튜디오 웨딩 촬영도 하지 않았다. 잔뜩 차려 입고 스튜디오에서 사진 찍을 생각에 손발이 오글거렸다. 아내도 나도 를 외쳤다. 대신 아는 사진 기자 선배에게 우리의 한강 데이트를 카메라에 담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때 찍은 사진이 우리 집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우편물 더미에 가려 제 모습이 보이진 않을 뿐이다.

지난해 12월 아이가 태어났다. 남들은 아이의 손·발 도장을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 부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이의 탯줄은 조리원에서 주니깐 받았다. 서랍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의 출생증명서, 출생신고를 한 직후 받은 주민등록등본은 조심스레 봉투에 넣어 서랍에 뒀다. 제 자리에 있겠지?

그런 나에게도 욕심을 부리고 싶은 게 생겼다. 바로 아이 사진이다. 처음엔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었다. 꽤 괜찮게 나왔다. 하지만 더 좋은 화질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인쇄해서 액자에 넣으려면 좋은 카메라가 필요한 게 아닌가(물론 지금까지 내가 찍은 아이 사진을 인쇄한 적은 없다.)

아내가 조리원에 있을 때 나도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아이 50일 사진을 공짜로 찍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더 알아보니, 사진 촬영 업체의 사업 노하우였다. 100일이나 돌 사진을 찍기 위해 50일 사진을 공짜로 찍어준다는 것이다. 아내는 50일 사진을 찍지 말자고 했다. 나는 망설였다. ‘화질 좋은 아이 사진 몇 장을 남겼으면 좋겠는데...’

결국 아내는 내 뜻을 받아들였고, 50일 사진을 찍었다. 참 잘 나왔는데, 뭔가 맘에 들지 않았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건 역시 손발을 오글거리게 한다. 무엇보다 대량생산 느낌이 났다. 사진 속 아이만 우리 아이지, 나머지에서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평소 일상 속 아이 사진을 찍자고 다짐했다. DSLR 카메라는 아니지만 요새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였다.

어느 날 엄마가 아내에게 아이 100일 사진을 언제 찍을 거냐고 물었다. 아내는 찍지 않을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돌아온 엄마의 말. “그래도 예쁘게 몇 장 찍어야지.” 아직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쪽은 시어머니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예전 같았으면 내가 엄마한테 안 찍을 거예요라고 했을 텐데, 끔찍한 손주 사랑을 인생의 낙으로 느끼는 엄마에게 굳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스튜디오 100일 사진은 싫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곳도 있다. 사진을 보니 참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다들 집들이 어찌나 으리으리한지. 가격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이런 고민이 깊어갈 때, 처형네에서 며칠 지냈다. 처조카들이 이모를 애타게 찾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내는 "여기서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아마 시어머니 말이 걸렸을 것이다. 업체에서 100일 사진을 찍는 게 탐탁지 않으니, 아이와 처조카들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난 카메라를 꺼냈다.

정면은 아니었지만 창밖에서 실내로 햇빛이 들어왔다. 역광인 셈이다. 몇 컷 찍었다. 베란다가 배경이라 사진이 예쁘지 않았다.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찍는구나. 망했다.' 많은 사진을 찍고 확인해보니, 어랏! 의도한 건 아니지만 뭔가 그럴듯한 사진이 나왔다. 배경은 환한 빛으로 처리됐고, 그 속에서 아이들이 빛났다.

그렇게 수십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대단히 잘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아이의 100일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앞으로 아이 사진을 많이 찍어야지!’ 사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사진을 취미로 둔 모든 남편들이 그렇듯 아내에게 좋은 렌즈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사진 촬영을 준비할 때, 찰칵!

아마 저처럼 아이 사진을 찍을 카메라를 고민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네요. 우선 제 카메라는 소니 a6000입니다. 렌즈는 일명 카페렌즈’(SEL35F18)라 불리는, 아주 밝은 단렌즈입니다.

몇 년 전, 100만 원을 넘게 주고 산 DSLR 카메라와 렌즈를 잃어버린 후, 카메라에 대한 신경을 껐습니다. 그때 화질에 만족했지만, 너무 무거웠던 기억이 생생했죠. 그 뒤로는 카메라는 무조건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뒤 디카도 들였고, 아이폰6와 같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아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실내에서는 어둡거나 흔들립니다. 배경흐림도 잘 안되죠. 그래서 미러리스 카메라가 뜨는 모양입니다. DSLR은 무겁고,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만족하지 못하니까요.

캐논이나 니콘에서도 더욱 가벼운 DSLR을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더 가벼운 미러리스를 골랐습니다. DSLR에 대한 향수가 있었지만, 성능이 비슷하다고 하니 고민이 길지 않았죠. 렌즈에 신경을 썼습니다. 밝은(조리개값이 낮은) 렌즈를 골랐습니다. 그래야 어두운 집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까요. 배경흐름 효과도 기대했죠. 여러 미러리스 중에서 가격과 센서 크기 등을 고민해 지금의 카메라를 골랐습니다. 저는 이 카메라와 최고의 휴대성을 자랑하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아이 사진을 찍고 있답니다.

아이 안고 변기에 앉았어요.”

얼마 전, 아내는 충격 고백을 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짠했다. 주말이나 휴가 때 아이를 돌보면서, 단 한 순간도 맘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는 우는 아이를 업고 식탁에 선 채 밥을 먹어야했고, 갓 잠든 아이를 깨울 수 없어 아이를 업은 채 화장실에 가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장난감이다. 아이가 10분이라도 장난감에 정신을 빼앗긴다면, 엄마 아빠는 숨을 돌리거나 밀린 집안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장난감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모빌에 잠깐 관심을 둘뿐, 계속 놀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곧 울음을 터트린다.

지난해 12월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 뒤, 페친이 아이가 쓰던 아기체육관을 분양했다. 많은 이들이 신청했다. 검색해보니, 인기 있는 장난감인 것 같아 나도 손을 들었다. 운 좋게도 당첨됐다. 아기체육관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걸 그 뒤에 알았다. 아기체육관 앞에 국민이라는 글자가 붙었으니까.

아기체육관은 생후 3개월부터 쓸 수 있다고 해서, 쓱쓱 닦아놓은 뒤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는 생후 3개월을 맞았지만 아기체육관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결국 우리 부부는 우리의 체력으로 아이와 놀아줬고,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토요일, 아이를 데리고 아내의 친구 집에 놀러갔다. 아내 친구에겐 17개월된 딸 하윤이가 있다. 긴 연륜답게, 꽤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아기체육관과 비슷하면서도 복잡한 에듀테이블이란 장난감이 있었다. 아내의 친구가 아이를 그 앞에 뒀다. 아이는 버튼을 누르며 관심을 보였다. 곧 아이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들리는듯 했다. ‘아빠, 이거 사주면 안 돼?’ 아이는 내 텔레파시 답변을 들었을까. ‘집에 아기체육관 있잖아.’

지금껏 우리 돈으로 산 장난감은 거의 없다. 대부분 처형이나 다른 육아 선배들한테 물려받았다. 여기에 아이가 어려 아직 장난감을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과 맞물려, 장난감을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관심을 두는 장난감이 생기니, 고민이 깊어졌다. 사줘야하나. 일요일 내가 아이를 돌볼 때, 아내는 노트북으로 에듀테이블을 검색했다.

가격은 6만 원을 웃돌았다. 나는 천천히 알아보자고 했고, 아내는 나도 여유롭게 밥 좀 먹고 싶어요. 사면 안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도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집에 있는 아기체육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일요일엔 집안일로 바쁘다. 아이를 돌보는 일을 빼더라도, 청소와 빨래, 요리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부부가 밥을 먹기 위해 거실을 비우자, 아이는 어김없이 찡찡거렸다. 급한 마음에 범보 의자에 앉은 아이 앞에 아기체육관을 뒀다.

어라? 아이가 아기체육관에 흥미를 보였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이 흘렀다. 아, 드디어 우리 집에도 봄이 오는구나!

아내의 또 다른 친구는 얼마 전 쏘서를 대여한 후, 처음으로 여유롭게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고 했다. 쏘서가 뭔지는 모르겠다. 아기체육관, 에듀테이블, 범보 의자, 쏘서... 이제 나도 아이 장난감 세계에 빠져들었다. 장난감이 우리 부부를 구원해주겠지. 검색해보니 생후 6개월 된 남자 아이한테는 점퍼루가 최고란다. 곧 점퍼루를 대여하러 가야겠다.


아이를 잠시 재워놓고, 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며칠 전 처형이 아내에게 한 말이다. 처형은 워킹맘(직장맘)이다. 여덟 살, 네 살 두 딸을 잘 키우고 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원더우먼이다. 처형이 잠, 휴식, 친구 등 많은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원더우먼도 가끔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날 오전 처형은 어린이집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 예린이가 열이 있는데다 밥도 먹지 않고 하염없이 울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처형에게 예린이를 일찍 하원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다. 벌써 그 주에만 두 번째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예린이가 새로운 반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일주일동안 일찍 하원시키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처형에게 전했다.

처형은 이번 달 이미 여러 차례 휴가를 냈다. 첫째 유라가 초등학교에 입학함에 따라, 챙길 게 많았던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조퇴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처형은 고민 끝에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아내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일을 하고 있는 예린이의 할머니가 예린이를 돌보기로 하면서, 처형은 위기를 넘겼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위기의 순간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까.

처형이 겪은 일은 모든 워킹맘들의 얘기이기도 하고, 당장 우리 부부의 가까운 미래다. 우리 부부는 당장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 처가는 포항에 있고, 안양 본가의 부모님은 새벽까지 노래방을 하신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급하게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 오롯이 우리 부부가 감당해야 한다.

아내는 2주 전부터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를 위해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찾았다. 아내는 아이도 돌보고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가 잘 때 아내가 일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엄마 손이 필요했다. 아내는 앉아서 밥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내는 낮에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본 뒤, 내가 퇴근한 후에야 숨을 돌렸다. 하지만 저녁에 잠깐 일하는 걸로는 원고 마감일을 지킬 수 없었다. 체력은 떨어지고 잠은 부족한 날들이 이어졌다. 마감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아내는 결국 내게 하루만 휴가를 내고 아이를 봐달라고 했다.

그때 내 대답은 어려운데였다.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단 걸 알았지만, 회사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그날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책임감을 느끼는지 알아요. 그런데 나는 마감일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육아도 함께하고 일하는 것도 도와준다고 해놓고선 결국 나만 동동거리고 있잖아요."

아차 싶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육아를 열심히 돕는 남편이라 자처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난 급하게 며칠의 휴가를 냈고, 아내는 서둘러 원고를 마감했다. 아내는 지금까지 마감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 원고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출판사에서 한 소리를 들은 뒤, 아내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못 다한 일이 머릿속을 맴돌고, 일을 하고 있으면 좀 더 안아주지 못해 아이에게 미안하고. 도대체 이게 뭔지. 내가 일을 너무 빨리 시작했나봐요."

나는 지금껏 세상의 수많은 원더우먼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더우먼들은 속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엄마들에게 왜 원더우먼이 되지 못하냐고 다그친다. 나도 내 아내가 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 원더우먼이 되길 바랐다. 생각이 짧았다. 아내에게 약속해야겠다. 곧 슈퍼맨이 우리 집에 날아들 거라고.

이때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오늘은 바람이 좀 불었지만, 햇볕이 따사로웠다. 미세먼지가 심각한 날인 줄도 모르고, 아내에게 불광천을 걷자고 졸랐다. 마음은 이미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를 자전거 뒤 유아용 트레일러에 태우고 한강으로 향한 지 오래다.

그제 회사 선배에게 받은 유모차를 닦고 시트를 빨았다. 그날 아이를 데리고 불광천에 다녀왔다. 아빠와 아들의 첫 데이트는 순조로웠다. 그때의 자신감 때문인지 나들이에 조심스러운 아내에겐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아이 엄마가 가방에 기저귀, 젖병, 분유, 따뜻한 물을 넣는 동안, 철없는 아빠인 난 사진기를 챙겼다. 집 밖으로 나와 물티슈를 챙기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무슨 대수랴.

불광천으로 향하는 길, 바람이 생각보다 거셌다. 아내의 걱정은 컸지만, 난 유모차를 거침없이 앞으로 밀었다. 아이는 유모차 안에서 조용히 세상 구경을 했다.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0분가량 걷다보니 배가 고파왔고, ‘피자가게가 보였다. ‘기저귀를 갈아야할 때는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구석이나 화장실에서 갈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가족은 가게의 구석진 곳에 앉았다. 유모차를 테이블 옆에 두고 아이를 살폈다. 좀 칭얼대자 기저귀를 봤더니 젖어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아이의 기저귀를 빠른 속도로 갈았다. 아이는 싱글벙글 웃었다. 난 아내에게 아이를 가리키며 효자가 났어요. 외식하러 나왔는데 엄마 아빠 밥 잘 먹으라고 조용히 앉아 있네요라고 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면, 우리 부부가 고상하게 피자를 먹을 시간이 확보될 것 같았다. 아내가 분유를 먹이는 사이, 피자가 도착했다. 피자를 잘라 아내에게 먹였다. 참 행복한 모습이 아닌가. 아이의 트림을 위해 내가 아이를 안았다. 옆 테이블 사람들의 시선은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고 귀여워, 안고 싶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이를 더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냄새가 났다. ‘, 아니야, 잘못 맡은 거겠지. 피자나 먹자.’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내려놓았다. 아이에게 웃음을 보여주고는 포크로 피자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아내의 외마디 비명. “, 쌌네!” 하얀 바지 엉덩이 쪽에 황금빛, 아니 누런 얼룩이 졌다. 우리 부부는 멘붕에 빠졌다. 먼저 각자의 접시에 담긴 피자 한 조각을 한 입에 먹어치웠다.

아내에게 집에 얼른 들어가서 해결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의 엉덩이가 짓무른다며 이곳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한테 물티슈가 없었다. 점원에게 손 닦는 데 쓰는 물티슈 여러 장을 부탁해 받았다. 아내는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화장실에서는 다행히 기저귀 교환대가 있었다.

아내는 아이를 눕히고 바지를 내렸다. 아내는 경악했다. 뒤에 그 상황을 대참사로 표현했다. 기저귀가 감당 못할 정도였으니, 바지까지 흘러내린 것이다. 작은 물티슈 몇 장으로 아이 엉덩이를 닦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화장실 휴지로는 어림없었다. 그렇다고 세면대에서 아이의 엉덩이를 닦을 순 없었다. 결국 아내는 결단을 내렸다. 손에 물을 묻힌 뒤, 아이의 엉덩이를 닦은 것이다.

그 순간, 화장실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당황한 아내는 아이의 기저귀를 채우고 똥 묻은 손을 급하게 물티슈로 닦고 물로 씻었다. 야속하게도 사람들은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몇 개월이나 됐어요?”, “애기야, 엄마 손 씻으니 조금만 기다려아내는 아이가 다리를 들어 누런 얼룩의 바지가 보일까봐 전전긍긍했다. 아내는 건성으로 답하며, 천기저귀로 아이를 감싼 후 화장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 부부는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서둘러 집으로 왔다. 그제야 숨을 돌렸다. 아내가 욕실에 따뜻한 물을 받는 사이, 난 아이의 바지를 벗겼다. 그 순간 아이는 오줌을 발사했다. 아내는 손에 똥을 묻혔고, 나는 오줌을 맞았다. 잊지 못할 우리 가족의 첫 나들이였다.


재벌가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더 어울렸을 포즈. 너 아빠한테 항의하는 거지?

어제의 일이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서울 서대문구 집에서 출발해, 경기도 안양시 본가로 향했다. 여기서 질문. 우리 세 식구는 어떻게 갔을까.

직접 차를 몰고 가면 좋겠지만, 차가 없다. 아 참, 근처에 사는 친한 형에게 15년 된 아반떼를 빌릴 수 있다. 하지만 형도 세 살배기 딸을 데리고 처가에 간 탓에 차를 빌릴 수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을까.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기 전, 전철을 이용했다. 6호선 증산역에서 탄 뒤, 합정역(6호선2호선)과 신도림역(2호선1호선)에서 갈아타고 석수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갓난아이는 이 여정을 소화하기 힘들 것이다. 아이를 안고 짐을 잔뜩 든 우리 부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택시는 어떨까. 2만 원가량의 요금이 나오겠지만, 자주 타는 게 아닌 이상 큰 부담은 아니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손님을 빨리 데려다주고, 다음 손님을 받아야 한다. “천천히 가주세요라고 해도 과속방지턱을 사뿐히 넘는 택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얼마 전 갓난아이를 안고 택시를 탄 아내는 앞으로는 되도록 택시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이쯤에서 정답을 공개해야겠다. 서울역까지 처형네 차를 얻어 탄 뒤, 서울역에서 광명역까지 KTX를 이용했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차로 10. 아빠가 마중 나왔다. 또 다시 질문. 집으로 돌아갈 땐 어떻게 갔을까. 우리 손에는 아이의 100일상에 올라간 떡, 잡채, 각종 반찬이 들렸다. 결국 동생이 나섰다. 부모님 차로 우리를 태워줬다. 동생은 다시 안양으로 가 부모님께 차를 돌려주고, 서울 금천구의 집으로 향했다.

참 미안한 일이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아이와 함께 이동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차가 없는 탓에, 마땅한 교통수단을 찾기 힘들다. 결국 다른 누군가를 수고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많지 않다.

차를 살까.

차를 최대한 늦게 사고 싶다. 작은 전셋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소원은 더 넓은 집, 더 좋은 집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 차를 산다면, 우리의 꿈은 몇 년 미뤄질 것이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한다. 차가 있다 해도 꽉 막히는 출퇴근길에는 대중교통을 타는 게 여러모로 낫다. 주말이라고 항상 어디론가 가는 건 아니다. 결국 차를 세워두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험료나 세금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수천만 원을 들여 주차장에 차를 전시할 의도가 아니라면, 차를 사는 건 실용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차를 사는 데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막대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차를 사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칠 것이다. 친한 형한테 차를 빌리는 것도, 처형네 차를 얻어 타는 것도, 아빠나 동생에게 태워달라는 것도 참 미안한 일이다.

차를 사야할까. 곧 이사도 가야 하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돈도 많이 들어갈 텐데. 고민이 깊어진다.


넌 언제 클래?

우리 가족은 한 달만에 다시 뭉쳤다. 설 연휴 때 아내와 아이는 처가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우리 가족, 행복하게 지낼 일만 남았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첫 날, 아내는 일어나지 못했다. 잇몸이 부어, 밥을 먹지 못했다. 같이 올라온 장모님이 해주신 죽을 먹어야 했다.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 두통약을 먹었다. 다행히 모유 수유에 지장이 없는 약이 있었다.

아내의 통증은 갈수록 커졌다. 이튿날 치과에 갔더니,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부은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잇몸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사랑니를 뽑을 수 있다고 했다. 잇몸 치료를 하고 진통제를 먹었지만, 낫지 않았다. 모유수유를 하느라 밤에 잠도 못자는 아내는 치통에 점점 지쳐갔다.

어금니에서 시작된 통증은 앞니까지 번졌고, 급기야 귀까지 아파왔다. 아내의 통증은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병원을 옮기고 약도 바꿔봤지만 듣지 않았다. 아내는 새벽에 몇 번이나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잠을 깼다.

며칠 전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내였다.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치과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너무 아파 항생제를 먹으려고요. 모유수유를 끊어야할 것 같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질금을 먹었어요라며 엉엉 울었다. 질금(엿기름)은 젖을 말리게 한다. 수유를 하지 않으면 젖이 차 아내의 가슴이 붓는다. 아내에게 큰 고통이다. 그래서 아예 젖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도 나도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아내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혼자 잠 못 자고 수유하느라 고생했어요. 80일간 모유수유 한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에요."

"이제야 편해졌잖아요. 젖도 잘 나오고, 아이도 편하게 젖을 빨고. 근데 하필 왜 지금 아파서. 내가 스스로 끊으면 모르겠는데, 오늘 아이한테 충분히 수유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유수유를 못하면, 나쁜 엄마가 되는 시대다. 잠 못 자고 수유를 하느라 아내가 말라가는데도, “힘들면 모유수유 끊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분유값도 아끼고 나도 잠을 푹 잘 수 있다는 얄팍한 마음도 있었다. 아내는 이미 출산 전 몸무게로 돌아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제 더 이상 모유수유를 못해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울컥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아내에게 말했다. “그럼 당신 맥주 먹을 수 있겠네요.” 내 실없는 농담에 아내는 그제야 웃었다.

아싸!”


부모님께 아이의 50일 사진을 보내드렸다. 닳아지도록 보고 또 보신다.

저리 좋을까. 설 연휴 첫날 아들이 찾아왔는데, 엄마는 하루 종일 스마트폰 삼매경이다. 손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톡톡 치면서 계속 웃으신다. "몇 번이나 봤으면서, 또 봐요?" "꾀꼬리 소리 내는 것 봐. 너무 귀엽잖아." 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엄마, 가스레인지에 국 넘쳐요." 그제야 몸을 움직이신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엄마의 손주, 다시 말해 내 아이의 영상이 담겨있다. 아내가 한 달 전부터 엄마한테 1~2분짜리 영상 네다섯 개를 보냈다. 아빠에 따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손주 영상에 푹 빠져있단다. 운영하고 있는 노래방에서도 손님이 없을 땐 스마트폰 속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워, 영상통화를 주선했다.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낄낄 웃으신다. 엄마는 영상통화 후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달라고 하신다. "영상통화는 동영상처럼 저장할 수 없어요." 엄마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이는 부모님의 첫 손주다. 그래서 그런지 손주 사랑이 대단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금방 크니 아이 옷을 많이 사지 마세요”라고 당부 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걸 못 참고 겨울 내복을 잔뜩 사오셨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몇 번 입히지 못했는데, 벌써 겨울의 끝자락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기르면서,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한다. 난 부모님에게 참 무뚝뚝한 아이였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었다고 할까. 대학 입시 때 부모님께 대학 합격증만 가져다드렸다. 어떤 대학에 갈지, 어떤 과에 갈지 단 한 번도 상의하지 않았다. 살면서 내가 먼저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린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결혼한 뒤 나는 본가에 가기 귀찮아했고, 아내가 나를 끌고 본가로 가야 했다. 나 같이 무뚝뚝한 아들도 있을까 싶다.

아이를 보니, 그제야 부모님께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서른넷에 효자 났다. 부모님께 더 살갑게 하고 전화도 자주 드리고 싶지만,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글러먹었으니, 아이를 할머니·할아버지께 잘하는 손주로 만들자는 전략을 짰다. ‘우선, 아이를 부모님께 자주 보여드리자.’

이번 설 연휴 때 부모님은 손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포항 처가에 있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안양 본가에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핑계 아닌 핑계도 댔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건 내 의지 부족일 게다. 역시 난 무뚝뚝한 불효자다.

설 연휴 내내 부모님이 스마트폰 속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난 처가에서 아이와 한 달 만에 상봉한 후 함께 뒹굴었다. 그러던 엊그제, 아내가 내게 다가와 슬쩍 귀띔했다. “하루 일찍 올라가는 기차표를 구했어요.”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안양 본가의 문을 두드리겠단다. 무심한 아들은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때, 오히려 며느리가 부모님 생각을 한 것이다. 고맙고 미안했다.

갑작스럽게 감동을 받은 나는 아내에게 “우리 아이는 나처럼 말고, 부모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로 키웁시다, 특히 엄마한테 잘하는 녀석으로 교육시킬게요”라고 말했다. 아내는 말했다. “아들은 결혼하면 남이야. 당신을 봐. 난 내 아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을 키우는 거예요.” 

아들아, 부디 넌 아빠를 닮지 말아다오.

나와 아이는 밤늦은 시간까지 대치했고, 새벽 겨우 잠들었다. 아내가 이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빠, 아프지 마요.”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아이 사진과 함께. 몸살에 걸려 몸져누운 상태에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포항 처가에 있는 아내가 보낸 것이다. 아이가 내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울컥했다.

아빠가 아파서 미안해.’

지난 주말의 일이다. 일요일 당직 근무를 섰다. 그날 오후 경기도 양주시 마트 화재 사고를 취재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추운 줄도 모르고 맨 손에 취재수첩과 펜을 들었다. 기사를 쓰려고 탁자가 있는 빵집에 들어갔다. 손을 녹이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렸다. 끼니를 대충 빵으로 때우며, 기사를 썼다.

기사를 마무리한 후, 안양으로 향했다. 월요일 쉬면서 집에서 혼자 보내는 것보다 부모님 댁에 가서 맛있는 걸 얻어먹기로 한 것이다. 양주에서 안양까지 지하철로 2시간이 걸렸다. 부모님 댁에 도착한 건 자정에 가까운 때였다. 씻은 뒤, 바로 잠들었다.

이튿날 일어나니, 오한이 느껴졌다. 몸살이었다. 아내가 처가에 간 뒤, ‘기러기 아빠생활을 하면서 최대한 잘 먹으려고 했다. 홀로 지내는 남자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홀로 밥도 잘해먹는 만능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구나 앞으로 아이를 잘 돌보려면, 튼튼한 몸은 필수 아닌가.

그랬던 내가 몸져누웠다. 사실 몸 상태가 나빠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직 근무 전날 오랜만에 술을 진탕 마셨다. 오후에는 집들이, 저녁에는 친구들과의 술 약속이 있었다. 취할 정도로 마셨다. 아주 오랜만에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잠시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니,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였을까.

점심 때, 오랜만에 아들을 본 부모님은 한우를 구웠다. 난 몇 점 먹지 못했다. “병원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에 괜찮아요라며 짜증냈다. 아내와 영상통화를 했다. 내 몰골을 본 아내는 바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조금 뒤 아이의 사진과 메시지가 왔다.

아빠, 병원 갔다 와서 약 먹고 자요. 그래야 낫지요. 아프지 마요.”

아이에게 언제나 멋지고 든든한 아빠이고 싶다. 축구하면 골을 넣고, 야구를 하면 홈런 친 뒤, 아이로부터 아빠 멋있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쁠까. 반대로, 헛발질을 하거나 삼진을 당한다면? 안될 일이다. 내 모습은 여기에 가깝지만. 아이에게 비실비실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아직 아이는 사리 분별을 못하겠지만, 아이의 사진을 보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제야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는 얼른 나아서 아이를 보러 오라고 했다. 주사 맞고 와서는 바로 잠들었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에야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아이의 잠든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사진 속 아이에게 말했다.

네 사진을 보고 힘이 나서, 몸살을 이겼어. 아빠 멋있지?“

아이의 외할아버지가 아이를 꼭 안고 있다.

아이의 엄마가 쓴 글입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젖 물리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유축이나 분유에 익숙해진 아이는 억지로 젖을 물리려는 초보 엄마의 고집에 눈물 콧물을 짜며 세상 떠나가라 울음을 터트렸다.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어찌할 바 모르던 나는 식은땀을 연신 흘려댔다. 그렇게 나는 갓난쟁이와 모유수유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같던 5~6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이는 엄마의 젖을 물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빠가 다 큰 딸아이와 핏덩이 손주의 사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민망한 듯 씨익 웃고는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와 함께 마트에 갔다. 급하게 친정으로 오느라 챙겨오지 못한 유아용품을 사기 위해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마트로 향하던 그때, 무심한 듯 꺼낸 아빠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가 봄이에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

나는 어떤 말로 대화를 이어가야할지 몰라 "…" 하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깐 나의 할머니는 아빠가 돌 무렵 돌아가셨다. 아빠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핏덩이를 업은 채 피난길에 올랐다.

폐가에, 들에, 산에 몸을 숨기며 이어져간 피난길에서 독사는 할머니의 다리를 물었다. 인민군 군의관의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독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다리만 잘라냈어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리를 자르는 대신 결국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독이 퍼진 할머니의 젖을 먹었던 아빠는 오른쪽 눈의 시력이 온전치 못하다.

"아빠가 그때 딱 봄이 정도 됐을 때잖아. 봄이를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 저 핏덩이를 두고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거라…"

어릴 적 시골 어르신들은 아빠를 조금 다르게 불렀다. 아빠의 이름 앞에는 늘 꾸밈말이 붙었다. “불쌍한 여우.” 경상도 어르신들은 영우여우라 부르셨고, 그 이름 앞에는 늘 불쌍한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었다. 마치 불쌍한 여우라는 말이 고유명사인 듯, 아빠는 그렇게 불렸다.

돌도 되기 전에 엄마를 잃은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엄마 젖을 물어야 하는 갓난쟁이가 안쓰러웠을 게다.

30년 넘게 들어온 어르신들의 불쌍한 여우가 마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르게 들렸다. 나에겐 늘 아빠였던 남자가 봄이처럼 갓난쟁이일 때도,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도 있었다는 걸 잊고 살았다. 아빠는 참 외로웠고, 엄마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젖을 직접 빨지 못해 안쓰러웠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며 자책도 했다. 모유를 유축해 먹여도 되고 분유를 먹여도 되는 데 말이다. 그냥 나의 잘못으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 같고, 직접 수유를 하지 않으면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죽하셨을까. 스물여덟. 젊다 못해 어린 엄마는 독이 퍼진 상태에서도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갓난쟁이 아이가 피난길에 먹을 수 있는 건 엄마의 젖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마트에 다녀온 후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엄마 아빠가 아닌, 갓난쟁이의 엄마 아빠, 사춘기의 엄마 아빠, 20대의 엄마 아빠를 떠올려본다. 내 엄마 아빠가 아닌 그냥 이영우, 김순분을.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인 엄마 아빠를.

빛나던 두 분의 젊은 날을 담보로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그리고 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보고 있으니 '엄마 아빠도 나를 키우느라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큼 엄마 아빠도 '보호받고 싶겠구나' 싶다. 이제야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송구스럽다.

- 2015. 1. 31 늦은 밤 엄마가 

내 아이를 품에 안는 건, 감동적인 일이다.

며칠 전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친정으로 갔다. 아이를 위해서다. 난 '기러기 아빠'가 됐다. 아내 품에 안긴 아이를 받아 내 품에 두는 건 퇴근 후의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젠 쓸쓸히 현관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 집은 춥다. 빌라촌 한가운데에 있는 집이라 낮에 볕이 잘 들지 않는다. 추운 건 보일러를 빵빵 틀면 해결된다. 문제는 아이를 씻기는 일이다. 욕실에 딸린 작은 창문은 베란다로 향해있다. 베란다는 이중창이 아닌 탓에, 웃풍이 스며든다. 이곳에서 아이를 씻길 수는 없다.

아이를 위해 처형 네로 피난을 갔다. 아파트는 역시 좋다. 하지만 계속 신세를 질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아내의 몸조리를 돕던 장모님도 곧 내려가야 했다. 고민 끝에, 아내는 전격 포항행을 외쳤다.

곧 아내와 아이가 떠났다. 며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 아내에게 하루 종일 아이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졸랐고, 퇴근하면 영상통화로 아이의 모습을 봤다. 아내에게 집에 가니 좋겠네라고 몇 번 말했다. 날 홀로 둔 채 따뜻하고 편안한 친정에서 아이와 즐거워하는 모습에 샘이 나서 나온 말일 터다.

아내는 딱 한 번, 자신의 모습을 사진 찍어 보낸 일이 있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고 지친 모습이었다. 우스갯소리로 거지꼴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금요일 퇴근 후, 밤 기차를 타고 처가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지만, 하루라도 아이를 직접 보고 싶었다. 새벽이 돼서야, 처가에 닿았다. 우리 부자는 며칠 만에 조우했다. 아이는 무슨 일인가 싶었겠지만, 난 몇 달 만에 아이를 만난 것처럼 부비부비했다.

곧 아이를 내 옆에 두고 잠을 청했다. “오늘 밤은 내가 아이를 볼게.” 그동안 밤잠을 설쳤을 장모님과 아내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 아내, 아이가 한 방을 썼다. 1시간 뒤 아이가 울자, 기저귀를 확인하고 젖병을 물렸다. 며칠 안 했다고, 어색하다. 젖병을 다 비웠지만 아이는 계속 칭얼댄다. 결국 아내가 나섰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 이게 아닌데...’ 처음엔 아이와 밤을 지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 바보아빠니까. 그런데 정작 새벽에 아이가 울자 피곤함에 몸이 무거웠다. 아이를 달래는 아내에게 말했다. “갑자기 피곤하네, 난 좀 잘게.” 그러곤 아침까지 잤다. 아이가 똥을 많이 싸는 바람에 놀란 아내의 비명 탓에 깼다. 아내는 밤을 새웠다고 했다.

오늘 아이를 안고 집안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아이가 며칠 동안 자란 것 같다. 누군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하루 종일 안아 달래고, 끊임없이 먹이고 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멀리서 사진과 영상통화로 바라보는 건 쉽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장모님은 아이를 안고 소파에서 잠이 드셨다. 난 오후에 피곤하다며 드러누웠는데. 참 못난 남편, 못난 사위, 못난 아빠다.

아내와 장모님을 위해, 우리 부자의 관계를 위해, 오늘은 내가 아이를 책임져야겠다. 오늘 밤은 불토.

- 2015. 1. 24 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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