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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해준 이유식, 맛있니?

아내가 고구마밥을 했다. 아내가 그릇에 고구마가 잔뜩 담긴 밥을 펐다. 쌀밥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황금빛 고구마 조각!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런데, 아내는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외면하고 고구마를 다시 밥솥에 던다. “왜 그래요?”, “아이 줄 거예요.”

그렇다. 이제 고구마도 아이 먼저다. 장인 어른이 며칠 전 사과 한 박스를 보내셨다. 아이가 제일 먼저 맛봤다. 그 전에 장모님께서 고기 좋아하는 사위를 위해 올려보낸 스테이크용 쇠고기 안심도 어느새 아이 이유식 거리가 됐다. 그나마 이유식을 하고 남은 사과와 쇠고기 정도를 맛볼 수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는 며칠에 한 번씩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아이 이유식을 만드는 소리다. 이제 먹을거리를 아이에게 양보하는 것을 넘어,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어 떠먹여줘야 한다. 끙! 상전이 따로 없다!

이유식을 만드는 것은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결혼하면서 난 요리하는 남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출근하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퇴근 뒤 아내가 준비한 저녁을 먹는다. 염치없는 남편은 주말에 가끔 음식을 한다. 그것도 고작 파스타. 지난 주말엔 인터넷을 뒤져 굴 소스를 넣은 두부파프리카볶음을 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 아내가 부엌에서 이유식을 만드느라 낑낑대고 있을 때난 피곤하다를 외치며 안방에 늘어져 있었다아내가 S.O.S를 칠 때야 부엌으로 갔다. 이유식을 만드는 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우리 아이 밥인데...'

얼마 전, 아내에게 속죄의 의미로 나 혼자 이유식을 만들겠다고 했다. 메뉴는 아내가 정했다. 달력에 적힌 이유식 식단표를 본 뒤, 브로콜리와 쇠고기를 내어왔다.

정성스럽게 쓱쓱. 손은 덜덜.

브로콜리를 씻고, 줄기를 뜯은 다음 잘게 다졌다.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니 느리다. 고기도 잘게 자른다. 아이가 먹기 힘든 질긴 힘줄을 빼낸다. 허리를 굽힌 채 칼질한 지 20, 허리가 아파왔다. 쌀죽을 끓이고, 여기에 쇠고기를 분쇄기로 갈아 넣고, 마지막에 브로콜리를 넣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죽을 저었다. 이유식 세 끼 분량이 나왔다. 만드는 데 30. 허리가 쑤셨다. ‘이제 끝났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아내는 내 앞으로 당근을 내놓았다. 내 입에서 "아이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유식을 모두 만든 후, 방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내가 만든 이유식을 아이가 먹는 상상을 하니,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다. 이튿날 회사에 간 나를 대신에 아내는 내가 만든 이유식을 아이에게 먹였다. 한 그릇 잘 비웠단다. 뿌듯했다. 주말에는 꼭 내가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였다. 잘 먹는 아이가 대견했다.

아이 입 속으로 이유식을 밀어 넣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아이 스스로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겠지. 그땐 아이와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나와 아이는 언제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난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부모님과 함께 밥상에 앉지 못했다. 맨날 늦잠 잔 탓에 아침을 먹지 못했다. 부모님은 항상 밤늦도록 일을 하셨고, 고등학생이 된 나도 늦은 밤에야 집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가 서로에게 어땠는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방에서 잠들었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부모님이 새벽까지 호프집이나 노래방을 운영하면서, 우리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아쉽다. 그래서인지 난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밥상에 둘러앉아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며 즐겁게 밥을 먹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허투루 하는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책을 읽다가 이 시가 눈에 띄었나 보다.


끼니 / 고운기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문법(問法)은 아니지

차라리 못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 먹고 들을 나가

날라 오는 새참이며 점심 바구니

끼니마다 집에서 만든 밥 먹던 생각

그것이 힘의 원천

저녁이면 큰 상 작은 상

각기 제 몫의 상에 앉아

제 밥그릇 찾아먹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

무슨 벼슬한다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며

제 그릇 하나 찾아먹지 못하고 사노

먹는 게 아니라 때우면서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나

멀쩡한 제집 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면서

 

-고운기 시집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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