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정든 골목길. 안녕.

30분 만에 전세금을 확보하라!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밤늦은 시각, 전세계약을 위해 집 앞 부동산 공인중개사무소로 향했다. 아내는 아이를 재우느라, 나 혼자 나섰다. 아직 집주인은 오지 않았다. 공인중개사가 "바로 계약한다고 하지 않았으면, 전셋집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 웃었다. 전날 우리 부부를 포함해 여러 명이 그날 나온 전셋집을 봤고, 우리는 집을 보자마자 바로 계약 의사를 밝혔다.

40대 부부가 들어왔다. 집주인 부부였다. 아저씨는 수수한 차림이었고, 아주머니는 다소 꾸민 티가 났다.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나와 아주머니는 마주 앉았다. 공인중개사가 나와 아주머니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전세계약서를 쓰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 전세계약을 한 기념으로 어떤 맥주로 축배를 들까 고민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얼어붙었다. 공인중개사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것이라고 넌지시 일렀다. 나도, 공인중개사도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줄 알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전세자금대출이 뭐 대수랴. 그런데, 아주머니는 인상을 쓰면서 "그게 뭐예요?"라고 정색했다. 계약서를 쓰는 손은 멈췄고, 곧 펜을 놓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여기 안 왔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공인중개사는 아주머니에게 차근차근 전세자금대출을 설명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등기부 등본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까지 대출을 한 번도 받지 않았어요. 지금 살고 있는 세입자도 대출을 받지 않았어요"라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공인중개사는 "요새는 다들 전세자금대출을 받고 들어와요. 문제가 생겨도 집주인과 상관 없어요"라며 재차 설명했지만,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고, 나한테 왜 모르냐고 얘기하면 어떻게 해요. 기분이 정말 나쁘네요라고 언성을 높였다.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았다. 왜 괜히 전세자금대출을 받아서... 울컥했다. “전세계약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공인중개사가 여러 차례 사과한 뒤에야, 아주머니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공인중개사가 이번에는 나를 보면서 “우리 때문에 괜히 저 분이..."라고 말을 꺼냈다. 다들 나를 쳐다봤다. 잘못한 게 없는데,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복잡한 전선줄. 내 마음도 그렇다.

아주머니는 쌓였던 다양한 불만을 꺼내기 시작했고, 공인중개사는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절박한 마음에 내가 입을 뗐다. “결코 문제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했다. 공인중개사가 “집주인한테 피해가 가는 것도 불편한 것도 없어요. 다만, 은행에서 세입자분이 전세자금대출을 전세 용도로 쓰는지 전화를 할 거에요. 전화만 받으면 돼요라고 거들었지만, 아주머니는 아직도 맘에 안 들어하는 눈치다.

귀찮은 거 싫은데...”

내겐 절박한 일이지만, 집주인은 귀찮은 전화 한 통일 뿐이었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우여곡절 끝에 아주머니는 다시 펜을 들어 전세계약서를 써 내려갔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계약서 특약사항에 전세자금대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세입자가 책임진다는 내용을 넣어 달라고 했다. 몇 분 뒤에는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할 때에는 세입자가 모두 책임진다"고 써달라고 했다.

계약을 마무리한 후, 집주인 부부는 우리는 그렇게 깐깐한 사람들이 아니에요라고 웃었다. , 네네.” 나쁜 분들은 아니겠지. 다만 집주인이겠지. 전세계약서를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정복여 시인과 같은 집주인은 없을까.


꿈꾸는 사업 / 정복여

집을 한 다섯 채 지어서 세놓을까
한 채는 앞마당 바람 생각가지 사이에, 한 채는 초여름쥐똥나무 그 뿌리에, 다른 한 채는 저녁 주황베란다에, 또 한 채는 추운 목욕탕 모퉁이에 지어,
한 집은 잔물결구름에게 주고, 한 집은 분가한 일개미가족에게 주고, 또 한 집은 창을 기웃대는 개망초흰풀에게, 한 집은 연못가 안개새벽에게 그리고 한집은 혼자 사는 밤줄거미에게 주어,

처음에는 집세를 많이 받겠다고 하다가
다음에는 집세를 깎아주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그냥 살아만 달라고 하면서
거기 모여 사는 착한 이웃 옆에
나도 그렇게 세를 놓을까

- 정복여 시인의 시집 <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쳐지나>(창비, 2000)

이젠 넓은 집에서 '개구리 점퍼루'를 타렴.

지난 주말 집을 구했다. 집주인과 마주 앉아 전세계약서를 쓰기 직전까지 조마조마 마음을 졸일 만큼, 끝까지 다사다난했다. 가까스로 전세 계약을 했다. 이 과정을 두 편으로 나눠 쓴다. 시간이 지나면 웃으면서 오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마 그땐 다시 전셋집을 구하느라 정신없겠지.

달력을 넘기다 손이 찢어졌어요

어머니가 웃으시며 붕대로 감싸주셨어요

얘야 시간은 날카롭단다

- 조인선 시인의 시 '인터넷 정육점' 중에서 

****

며칠 전, 퇴근 시간이 가까웠을 때 한 공인중개사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괜찮은 전셋집이 나왔다고 했다. 다소 오래된 빌라지만, 3개의 넓은 집이란다. 전셋값도 방 2개짜리 작은 신축 빌라보다 쌌다. 공인중개사는 전세물건이 뜨자마자 내게 연락했다면서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칼퇴가 가능했다. 아내에게 연락해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보러가기로 했다. 공인중개사와 함께 그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곳에 사는 세입자가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두 팀이 집을 보고 갔고, 우리 다음에 또 한 팀이 온다고 했다. 2년 전 신혼집을 구할 때 괜찮은 전셋집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을 둘러봤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좁았던 탓일까. 집이 꽤 넓어보였다. 부엌과 화장실이 좁았지만, 거실이 잘 빠졌다. 거실 창문을 열자 바로 옆 빌라가 맞닿아있었다. 일조량과 조망권은 포기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또 언제 이만한 전셋집이 나오랴.

난 우리 부부가 마련할 수 있는 돈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완벽한 빌라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내와 함께 부엌 쪽 베란다를 살펴보다가, 아내에게 나직이 일렀다. “집 괜찮은 것 같아요. 계약 합시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부의 결정 장애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졌다.

세입자에게 습기가 차는지, 누수가 있는지, 집주인은 어떤지 등을 꼼꼼하게 캐물었다. 큰 문제는 없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9월 중순에 이사해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그가 답했다.

안돼요. 9월 초순에 이사해야 합니다.”

****

불광천이 좋아 북가좌동에 신혼집을 차렸지만, 불광천에 가까운 집은 너무 비싸다.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후 공인중개사에게 계약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당장 가계약금을 걸 수 없었다. 먼저 9월 초순에 이 세입자에게 줄 전세금을 마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세자금대출을 최대한도로 빌린다 해도, 나머지 수천만 원은 어디서 빌릴 수 있을까. 쉬 답이 나오지 않았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에게 연락해 전세금을 9월 초순에 미리 빼달라는 부탁을 해보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조급해졌다. 30분만 지체해도 누군가가 이 집을 계약할 것 같았다.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아내가 공인중개사무소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아내가 말했다.

아빠가 해주시겠대요.”

안도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공인중개사무소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장인어른,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세입자 쪽에 연락해 계약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가계약금 100만 원을 넣었다. 9월 초순 전세자금대출과 장인어른께 빌릴 돈으로 전세금을 내고, 9월 중순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으로부터 돌려받을 전세금으로 장인어른께 돈을 갚기로 했다.

뒷날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그때 가계약금을 넣지 않았다면 계약할 수 없었다. 이미 우리 앞에 이 집을 본 한 사람이 맘에 들어 했고, 남편의 늦은 퇴근시간에 맞춰 함께 다시 집을 보기로 했단다. 그나마 칼퇴를 할 수 있었던 우리 부부가 먼저 전셋집을 찜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분들은 우리 때문에 계약을 놓친 셈이다.

참 안타까웠다. 우리나 그분들이나. 그리고 전세난민 모두.

이튿날 오전 은행에서 전세자금대출 상담을 받은 뒤, 그날 저녁 전세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땐 몰랐다. 전세 계약 직전, 집주인이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칠 줄은.

불광역에 붙어 있는 빌라 분양 전단.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일요일 밖에 나왔는데, 집주인 쪽 부동산공인중개사가 전화했다. “손님이 왔는데 빈 집을 봐도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집이 엉망이었다. 지금껏 깨끗하게 청소한 우리 집을 본 사람 중에서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오늘은 기대를 접어야 했다. 심드렁하게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 공인중개사가 다시 전화했다. “계약한대요.”

계약날짜는 두 달 뒤로 정해졌다. 그때까지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한다. 최근 두 달 동안 많은 집들을 봤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아니, 전셋집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냈다. 아내와 함께 은평구 쪽 전셋집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내가 아이를 안았다. 날씨는 후텁지근했고, 아이는 칭얼거렸다. 공인중개사무소 몇 군데에 연락처만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응암역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무소에 들어갔다. 사정을 얘기하자, 어제 나온 전셋집이 있다고 했다. 교통이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나중에 좋은 전셋집이 있으면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려다가, 이왕 온 거 한 번 보기로 했다. 그래야 은평구 쪽 전셋집 시세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한 빌라 앞에 내렸다. 문을 열었더니,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우리 아이와 생일이 비슷해 보였다. 거실에는 우리 집에도 있는 장난감이 눈에 보였다. 우리 부부가 탐내고 있는 위고도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 우리 집이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집은 깨끗하고 넓었다. 맘에 들었다.

이 집을 보고 난 후 내 통장에는 수백만 원이 찍혔다. 현재 집주인이 새 전셋집 계약할 때 계약금으로 쓰라고 전세금의 일부를 보낸 것이다.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은 운때가 맞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치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두 달가량 집을 구했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우리 집이 나간 후, 첫 번째로 찾아간 공인중개사무소에서 본 첫 번째 전셋집이 맘에 들었다. 동시에 집주인은 계약금을 보내왔다.

그날 다른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아 전셋집 몇 군데를 봤지만, 첫 번째 집보다 맘에 드는 곳은 없었다. 아내와 논의 끝에 계약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외식을 하면서 축배를 들자고 했다. 아이를 안고 땡볕에서 집을 구하러 다니던 지난 두 달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내에게 미리 고생했어요”라고 말했다.

****

집 근처에 신축 빌라 공사하는 곳이 많다. 하지만 전세는 없다. (사진 속 건물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그날 저녁 집주인이 될 사람 쪽의 공인중개사무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계약할 집의 등기부등본을 봤다. 대출 14000만여 원. 전화로 대출을 다 갚았거나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과 달랐다. 공인중개사 쪽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항의하니, 내가 낼 전세금으로 대출금을 갚으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대출이 없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집이 팔리기 전에는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전세계약 만료일로부터 한 달 보름이 지난 뒤에야 이사를 하게 됐다. 대출이 많이 있는 집을 계약할 경우, 전세금을 받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폭탄이 터졌다. 잠시 외출한 집주인 쪽 공인중개사를 제외한, 우리 쪽 공인중개사, 집주인, 세입자가 될 우리 식구가 마주 앉았다. 우리 쪽 공인중개사가 전세자금대출을 설명하며 전셋값의 5%를 계약금으로 내야 한다고 언급하자, 집주인은 계약금은 10%로 해야 한다면서 불같이 화를 내고는 중개사무소를 나가버렸다.

아내는 내 팔을 잡으면서 불안해했다. 우리 쪽 공인중개사는 불안하면 계약하지 말자고 했다. 계약을 포기했다. 집으로 가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허망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서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힘을 냈다. 아이는 엄마 아빠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집에 갈 때까지 잘 안겨 있었다그날 밤 아내와 맥주 한 잔 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괜찮은 집, 나타나지 않겠어요?” 다소 우울할 때 힘이 되는 시를 소개한다.


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황인숙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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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옥상에서 찍은 빌라들. 우린 어떤 집을 구하게 될까?

미친 척 하고 대출 많이 당겨서, 집 사요.” 아내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부동산 담당 기자였던 몇 년 전,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을 펴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전셋집을 구하면서 빚내서 집사는 건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살고 있는 빌라 5층의 작은 신혼집 역시 최대한 빚을 내지 않기 위해 골랐다. 아내도 나도, 착실히 돈 모아서 나중에 번듯한 집으로 이사 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빚내서 집사자는 생각도 마다 않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전세 계약 만료는 8월 초다. 집주인이 비싸게 전세를 내놓은 탓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기미가 없었다. 최근 집주인은 집을 팔겠다고 했다. 전세 계약이 끝난 뒤에도 두 달 안에 집을 꼭 팔겠다고 했다. 해석을 하자면, 당장 전세금을 못 준다는 뜻이다. 법은 멀리 있다. 집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가을이면 전세 매물이 많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일주일 전 한 남자가 우리 집을 보러 왔다.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8월 중순에 이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흘러 넘겼다. 설마 이 집이 나갈까 싶었다. 집 주인은 시세보다 비싸게 내놓았다. 혹시 몰라 부동산 중개업소에 연락을 했다. 집을 보러왔던 사람이 대출 관계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계약이 이뤄진다면, 불과 한 달 보름 안에 이사를 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부랴부랴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북가좌동에는 전셋집 씨가 말랐다. 인근 성산동 쪽의 전셋집을 알아봤지만, 북가좌동보다 비싼 터라 맘에 들지 않았다.

토요일, 아내와 나는 각각 북가좌동과 우이동에서 집중적으로 전셋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우이동은 처형이 사는 곳으로, 아내에겐 2의 친정이다. 아내가 먼저 움직였다. 곧 아내로부터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신축 빌라 내부를 꼼꼼하게 보여줬다. 후에 아내에게 물었다. “왜 전셋집이 아니라, 신축빌라를 봤어요?” 아내의 대답은 간단했다. “전셋집이 없었으니까요.”

북가좌동에도 우리가 원하는 전셋집이 없었다.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다. 눈높이를 많이 낮추거나 아니면 많이 높이거나. 반전세나 월세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가 아니라면, 적잖은 부담이 될 것 같았다.

****

우리 집은 어딨니?

일요일 아이를 안고 집밖으로 나섰다. 부동산 중개업소가 문을 닫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집에 앉아서 걱정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를 걷다보니, ‘분양사무소라는 펼침막이 눈에 보였다. 신축 빌라였다.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겠지만, 몇 분을 그 앞에서 서성였다. 결국 펼침막에 나온 번호로 전화를 했고, 곧 신축 빌라 1층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나왔다.

‘OO주택 이사라고 적힌 명함을 건네받았다. 북가좌동에 빌라 여러 곳을 분양한다고 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차에 탔다. 한 신축 빌라에 내렸다. 알고 보니,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걸어서 3분 거리였다. 이곳 4층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감탄사를 내지를 뻔했다. 말 그대로 새 집이었다. 남향이었고, 전망도 괜찮았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 함께 둘러본 아내도 나쁘지 않은 눈치다. 헌데, 아저씨는 알고 보니 집이 나갔다고 했다. 작전인지,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신축 빌라 몇 군데를 더 보여줬다. 어떤 곳은 빛이 잘 안 들어왔고, 어떤 곳은 비쌌지만, 하나 같이 살고 싶을 만큼 깨끗한 새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오래 살 거라면, 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셋집은 없고, 대출 이자는 싸다. 집값도 전셋값과 큰 차이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2년 마다 이 난리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물론, 우리 부부도 어지간하면 빌라를 사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집값은 떨어지고, 팔려고 할 때 제때 팔리지 않는다는 말. 또한 빚은 싫다. 작은 집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돈을 모아 좋은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 부부에게 그걸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 ​​​​

- 김기택 시인의 시 '우산을 잃어버리다' 중에서

이제 장마다. 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집 아침 풍경. 아이가 늦잠 자는 아빠를 깨운다.

집주인이 우리 세 식구가 살고 있는 전셋집을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놓은 지 한 달 가까이 됐다. 지금까지 전셋집을 보러온 사람은 단 한 명이다.

2주 전의 일이다. 아내가 아이와 씨름하고 있던 평일 낮,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부동산 중개업자와 함께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시큰둥한 표정을 한 아주머니는 집을 휙 둘러보더니, 집이 아닌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다. "아기 냄새가 나네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1분 남짓 되는 시간이었단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에 집을 보러온 사람은 없었다.

전세 계약 만료는 두 달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전셋집은 나가지 않고 있다. 집주인 쪽 부동산 중개업자는 "요즘 전세가 없어서, 집이 금방 나갈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집주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셋값보다 3000만 원 더 비싸게 내놓았다. 주변 시세와 비교하면, 비싼 편인 것 같다. 전셋값을 내리지 않는 이상, 이 집에 살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 세 식구의 새로운 보금자리 구하기는 잠시 미뤄졌다. 그렇게 답답한 시간을 보내던 며칠 전, 내 휴대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주인이었다. 지금까지 부동산 중개업자를 사이에 두고 소통을 해왔기 때문에, 사실상 집주인과 하는 첫 통화였다. 다소 긴장됐다.

집주인은 빚내서 집을 샀는데, 집값이 오르지 않아서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셨군요따위의 추임새를 넣었다. 방심하던 차에 뭔가 훅 들어왔다. 집주인의 말이다.

"집을 팔려고 합니다."

전셋집도 안 나가는 마당에, 집을 판다니. 조짐이 좋지 않다. 빚이 있다는 넋두리와 비교적 비싼 전셋값을 감안하면, 집주인이 비싸게 집을 내놓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두 번째 훅이 들어왔다.

"집은 팔릴 겁니다. 다만, 혹시라도 집이 전세 계약 만료 전에 안 팔릴 수도 있어요. 그럴 땐 내가 두 달의 여유를 줄 수 있어요."

두 달의 여유? 무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주인이 말하는 여유는 우리 세 식구에게는 달가운 말이 아니었다. 계약 만료 이후 두 달 더 살게 해주겠다는 건데, 그 기간 동안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전셋집은 좁고, 5층인 탓에 아내가 무척 힘들어한다. 우린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선생님께서는 여유라고 말씀하시는데, 저희에게는 여유가 아니에요. 저희는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8월 초 전에 이사를 가는 게 목표거든요."

계약이 만료되는 즉시 전세금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바로 하지 못하고, 에둘러 표현했다. 집주인은 내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몇 번이나 그러니까 두 달의 여유를 준다고요라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바로 꺼내는 건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 선생님이 집을 팔기로 했다는 것만 들은 걸로 할게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희 전세 계약 만료 전에 집이 팔리거라 믿어요. 혹시라도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예상되면, 그때 가서 논의하시죠."

곧 전화를 끊었다. 복잡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아내와 통화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어서 빨리 집이 팔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쉽지 않은 이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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