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쓴 글입니다.


언젠가 아이의 발톱을 자르는 모습을, 남편이 찍었다.


나는 여름부터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하루는 늘 취업사이트 확인으로 끝났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아깝게 예비 합격자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낙방의 경험이 거듭될수록 마음의 상처도 커졌다.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는 구직자의 입장에서, 낙방의 원인은 나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부족할까. 나는 무엇을 더 채우고 준비해야 할까. 나의 경력단절이 문제일까. 내 나이가 너무 많나.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낙방의 상처가 아니었다. 원서를 낼 곳이 없다는 거였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눈높이를 낮춰야 하나생각했지만, 문제는 눈높이가 아니었다.

월급이 많은 곳에 지원할 땐 생활비에 학비까지 충당하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지라는 이유를 댔고, 월급이 적은 곳에 지원할 땐 경력 단절도 있고, 저녁엔 학교 문제로 야근이 불가하니 이 정도도 괜찮지 뭐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남편은 아직 실망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느 날 친한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에서 구인공고가 올라왔어요. 언니가 내보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내키지 않았다. 또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다. 잠시 쉼이 필요하다고 내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보내버릴 수 없는 기회였다. 이력서를 내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력서를 냈고, 나는 오늘 그곳에 면접을 봤다. ‘왠지 안 될 것 같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나의 발길을 마구 잡아끌었지만 면접 경험이라도 한 번 더 쌓자는 생각에 그곳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 내게 일어날 엄청난 일을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좌절감에 빠져있던 나는 긴장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묻는 말에 나의 생각만 잘 말하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

 

면접은 지원자 3명이 함께 그룹인터뷰로 진행됐다. 첫 질문은 자기소개와 지원동기였다. 첫 번째 지원자의 대답이 끝난 뒤 나는 입을 떼기 시작했다. 자기소개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헌데 지원동기를 말하며아뿔싸.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미쳤나. 정신 차려. 주책맞게 왜 이래.’ 헌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죄송해요. 제가 요즘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결혼하고 아이 낳고경력단절이

무슨 말을 해대는 거야!!!’ 나도 여배우처럼 예쁘게 눈물을 흘리고 싶었으나, 나는 어느 샌가 꺼억~ 꺼억~ 거리고 있었다. (젠장) 이미 아이라인은 번졌고, 립스틱은 다 빨아먹었다.

모두가 당황했지만 내가 제일 당황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심사위원들은 요즘 취업난이 심해서 이런 경우 종종 있다며 나를 위로하였지만, 주책맞게도 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함께 면접을 보는 지원자가 힘내라며 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깽판도 이런 깽판이 없었다. “왜 하필 이곳에 지원했냐는 질문엔 일을 하고 싶어 지원했다며 너무나 명확하지만 단순한 이유를 댔다. ‘어차피 망한 거 그냥 있는 그대로 하자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두 지원자는 열심히 자신들을 어필했다. 나는 너무 울어서인지 머리가 멍했다. 조금 진정되는 가싶다가도 혼자 울컥하고, 울컥하다가도 질문을 하면 대답은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면접은 1시간 20분 만에 끝이 났다. 함께 면접을 봤던 지원자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너무 창피했다. 남편과 친한 동생은 마음 편하게 하고 오라고 했지 누가 깽판치고 오라고 했냐진상 중에 개진상이라고 비웃었다. 그 비웃음이 위로가 됐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더 부끄러워진다. 나는 충분히 쥐구멍을 찾아 지구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한 가지 참으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죽도록 쪽팔리는데, 마음은 가볍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하나하나 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내가 처한 환경을 다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구직활동이 짧을 뿐이지 나는 이미 2년째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전해왔으며, 기대하고 좌절해왔다. 요 근래 다른 일들과 함께 구직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힘들었던 마음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면접 중에 터진 것이다.

한번쯤 그 마음을 털어낼 기회가 필요했던 것 같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터진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지금도 창피하다. 정말... ‘개쪽팔린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마음이 가볍다. 다시 구직활동에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 같다.

오늘 나로 인해 당황했을 면접관들과, 면접에 방해를 받았을 지원자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여전히 나는 창피하고,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날리고 있지만, 오늘 나의 진상짓을 들은 친한 동생의 우리 언니가 돌아왔다는 말처럼 나는 다시 나로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허나, 진상짓은 이걸로 끝내자.


****

 

남편은 힘을 내라면서 저 유명한 백석의 시를 읽어줬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도연명'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문장> 19414월호, <백석평전>(다산책방, 2014)에서 재인용 

아내가 쓴 글입니다.

2주 전, 포항 친정집으로 왔다. 이유는 많았다. 부정맥 진단으로 우울해진 아빠가 아이를 보고 싶어 하셨다. “아이가 있으면 웃을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엄마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인의 결혼식도 있었다. 결혼식은 부산이었지만,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나니 부산쯤이야 옆 동네처럼 느껴졌다. 마감을 한참 넘긴 일거리도 마무리해야 했다. 낮 시간에 엄마가 아이를 잠시만 봐줘도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쉬고 싶었다. 누군가 아이 낮잠만 재워줘도, 아니 분유만 한 번 먹여줘도 살 것만 같았다.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한 한의원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 엄지손가락부터 시작된 통증이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번졌다. 급기야 아이를 안는 게 두려워질 정도였다. 엄마들의 손목, 무릎, 어깨 통증을 익히 들어온 터라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매번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엔. 난 그리 기억력이 좋지도, 침착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울면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과 손목에 무리가 가도록 안았고, 수유를 할 때나 원고 작업을 할 때면 거북이 목을 하고 어깨에 통증을 가중시켰다. 결국 남편의 연차 휴가일에 아이를 맡기고 한의원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아픈 거 같아요?”

아이를 안아서요?”

맞아요. 최대한 쓰지 말아야 해요.”

누가 모르나요. 헌데 우는 아이를 그냥 둘 순 없지 않은가.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한의사도 멋쩍어 웃었다. 안 되는 걸 모를 리 없으니 말이다.

남편 퇴근 시간이 어떻게 돼요?”

들쑥날쑥이라.”

화요일, 목요일에 야간진료하니깐. 8시까지 꼭 오세요. 그렇게라도 진료 받아야지, .”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알겠다고 답했지만 그 날 이후로 한의원을 가지 못했다. 남편의 퇴근이 늦은 날도 있고, 못다 한 살림을 하느라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다. 틈만 나면 "한의원 가라"는 남편의 말에도, 남편의 퇴근 후 홀로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이 어찌나 달콤한지, 쉬이 엉덩이를 떼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다 포항으로 왔다. 부모님은 생글생글 웃는 손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밀린 원고도 3일 만에 끝냈다. 엄마가 아이를 업고 낮잠을 재워주실 땐, 나도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의원을 갈 수도 있었다.

애기 혼자 봐요?”

도와줄 사람 없어요?”

서울 언제 가요?”

서울 가면 또 혼자 애기 보겠네?”

한의사와 간호사들은 내가 한의원에 갈 때마다 되물었다. ‘왜 이렇게 돌아가며 같은 질문을 하나싶다가도 왠지 고맙기도 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3개월이 넘어서도 체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꾸 축축 늘어지고 온 몸엔 힘이 빠졌다. 겉으론 멀쩡한데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나 약 좀 먹을래를 외쳤고, 결국 엄마에게서 흑염소를 득템했다.

육아는 체력전이라던 선배 맘들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린 대가였을까. 아이를 낳기 전에 체력을 키웠어야했는데, 내가 직접 겪지 않으면 그 말의 뜻을 체감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손목과 어깨 통증도 그렇다. 친구들은 아이를 안는 방법부터, 손목보호대를 꼭 착용하라는 충고까지 귀가 닳도록 말해줬다. 하지만 실전에 돌입하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결과 내 손목과 어깨는 이 모양 이 꼴이 됐다. 어깨는 너무 아파 밤잠을 설칠 정도다.

다행히 2주간의 치료로 통증은 많이 호전됐다. 하지만 육아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올라가면 애기 맡길 때 없죠? 치료받으러 가기도 힘들겠네. 지금이 한참 힘들 때야. 한참. 애기 좀 더 크면 괜찮아질 거예요.

손목과 발에 꽂혀 있던 침을 빼며 던진 간호사의 말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다들 하는 육아라지만, 다들 힘든 육아라지만, 누군가가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에 다들 하는 육아라, 다들 힘든 육아라, 차마 엄살을 피우지 못한 마음에 따뜻한 위로가 됐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나라에서 출산 연령을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며 침을 튀기기도 했다.

아이를 낳을 사람들을 미리 신청 받아서, 20대에 자기가 원하는 시기에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기를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아이는 팔팔한 20대가 키워야지 30대가 넘으면 본인도 힘들고 나라도 손해다.”

뭐 이런 되도 않은 소리를 외치며 누가 누가 더 힘드나를 경쟁했다. 아이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 , 을 키우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정말 경의를 표한다.

이제 갓 5개월 신입 맘에 접어든 나는 이 길을 걸어간 선배 맘이 참으로 대단하고, 이 길을 걸어갈 후배 맘이 참으로 걱정이다. 오지랖도 풍년인지라 육아는 체력이란 말을 꼭 후배 맘에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한 번 집 나간 손목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세상의 엄마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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