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언제 클래?

우리 가족은 한 달만에 다시 뭉쳤다. 설 연휴 때 아내와 아이는 처가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우리 가족, 행복하게 지낼 일만 남았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첫 날, 아내는 일어나지 못했다. 잇몸이 부어, 밥을 먹지 못했다. 같이 올라온 장모님이 해주신 죽을 먹어야 했다.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 두통약을 먹었다. 다행히 모유 수유에 지장이 없는 약이 있었다.

아내의 통증은 갈수록 커졌다. 이튿날 치과에 갔더니,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부은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잇몸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사랑니를 뽑을 수 있다고 했다. 잇몸 치료를 하고 진통제를 먹었지만, 낫지 않았다. 모유수유를 하느라 밤에 잠도 못자는 아내는 치통에 점점 지쳐갔다.

어금니에서 시작된 통증은 앞니까지 번졌고, 급기야 귀까지 아파왔다. 아내의 통증은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병원을 옮기고 약도 바꿔봤지만 듣지 않았다. 아내는 새벽에 몇 번이나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잠을 깼다.

며칠 전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내였다.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치과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너무 아파 항생제를 먹으려고요. 모유수유를 끊어야할 것 같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질금을 먹었어요라며 엉엉 울었다. 질금(엿기름)은 젖을 말리게 한다. 수유를 하지 않으면 젖이 차 아내의 가슴이 붓는다. 아내에게 큰 고통이다. 그래서 아예 젖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도 나도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아내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혼자 잠 못 자고 수유하느라 고생했어요. 80일간 모유수유 한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에요."

"이제야 편해졌잖아요. 젖도 잘 나오고, 아이도 편하게 젖을 빨고. 근데 하필 왜 지금 아파서. 내가 스스로 끊으면 모르겠는데, 오늘 아이한테 충분히 수유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유수유를 못하면, 나쁜 엄마가 되는 시대다. 잠 못 자고 수유를 하느라 아내가 말라가는데도, “힘들면 모유수유 끊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분유값도 아끼고 나도 잠을 푹 잘 수 있다는 얄팍한 마음도 있었다. 아내는 이미 출산 전 몸무게로 돌아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제 더 이상 모유수유를 못해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울컥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아내에게 말했다. “그럼 당신 맥주 먹을 수 있겠네요.” 내 실없는 농담에 아내는 그제야 웃었다.

아싸!”


부모님께 아이의 50일 사진을 보내드렸다. 닳아지도록 보고 또 보신다.

저리 좋을까. 설 연휴 첫날 아들이 찾아왔는데, 엄마는 하루 종일 스마트폰 삼매경이다. 손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톡톡 치면서 계속 웃으신다. "몇 번이나 봤으면서, 또 봐요?" "꾀꼬리 소리 내는 것 봐. 너무 귀엽잖아." 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엄마, 가스레인지에 국 넘쳐요." 그제야 몸을 움직이신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엄마의 손주, 다시 말해 내 아이의 영상이 담겨있다. 아내가 한 달 전부터 엄마한테 1~2분짜리 영상 네다섯 개를 보냈다. 아빠에 따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손주 영상에 푹 빠져있단다. 운영하고 있는 노래방에서도 손님이 없을 땐 스마트폰 속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워, 영상통화를 주선했다.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낄낄 웃으신다. 엄마는 영상통화 후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달라고 하신다. "영상통화는 동영상처럼 저장할 수 없어요." 엄마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이는 부모님의 첫 손주다. 그래서 그런지 손주 사랑이 대단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금방 크니 아이 옷을 많이 사지 마세요”라고 당부 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걸 못 참고 겨울 내복을 잔뜩 사오셨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몇 번 입히지 못했는데, 벌써 겨울의 끝자락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기르면서,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한다. 난 부모님에게 참 무뚝뚝한 아이였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었다고 할까. 대학 입시 때 부모님께 대학 합격증만 가져다드렸다. 어떤 대학에 갈지, 어떤 과에 갈지 단 한 번도 상의하지 않았다. 살면서 내가 먼저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린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결혼한 뒤 나는 본가에 가기 귀찮아했고, 아내가 나를 끌고 본가로 가야 했다. 나 같이 무뚝뚝한 아들도 있을까 싶다.

아이를 보니, 그제야 부모님께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서른넷에 효자 났다. 부모님께 더 살갑게 하고 전화도 자주 드리고 싶지만,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글러먹었으니, 아이를 할머니·할아버지께 잘하는 손주로 만들자는 전략을 짰다. ‘우선, 아이를 부모님께 자주 보여드리자.’

이번 설 연휴 때 부모님은 손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포항 처가에 있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안양 본가에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핑계 아닌 핑계도 댔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건 내 의지 부족일 게다. 역시 난 무뚝뚝한 불효자다.

설 연휴 내내 부모님이 스마트폰 속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난 처가에서 아이와 한 달 만에 상봉한 후 함께 뒹굴었다. 그러던 엊그제, 아내가 내게 다가와 슬쩍 귀띔했다. “하루 일찍 올라가는 기차표를 구했어요.”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안양 본가의 문을 두드리겠단다. 무심한 아들은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때, 오히려 며느리가 부모님 생각을 한 것이다. 고맙고 미안했다.

갑작스럽게 감동을 받은 나는 아내에게 “우리 아이는 나처럼 말고, 부모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로 키웁시다, 특히 엄마한테 잘하는 녀석으로 교육시킬게요”라고 말했다. 아내는 말했다. “아들은 결혼하면 남이야. 당신을 봐. 난 내 아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을 키우는 거예요.” 

아들아, 부디 넌 아빠를 닮지 말아다오.

널 어떻게 키울까. 아빠는 벌써부터 고민이네.

며칠 전, 혁신학교 기획 취재로 부천의 한 초등학교를 찾았다. 4년 전만 해도 죽어가는학교였다. 그땐 주변 어린이집에서 예비 초등학생 학부모에게 자녀를 다른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위장전입을 권했단다. 하지만 몇몇 어머니들은 학교를 바꿔보자며 힘을 모았고, 변화가 시작됐다. 한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4년 전 아이가 이곳에 입학할 때, 놀랐어요. 제가 다니던 30년 전의 학교와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세상은 많이 바뀌었는데...”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만 존중받고, 나머지는 열패감을 맞본다. 하루 종일 조그마한 책상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른인 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뛰어놀아야할 아이들에게 학교와 감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20여 년 전 나의 학창시절도 마찬가지였다.

1991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 왔다.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놀려댔고, 걸상을 던지며 싸웠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 집에서 돈을 받아 학교에 기성회비를 냈다. 하지만 돈이 없어졌다. 선생님은 교실의 모든 학생들 앞에서 나를 의심하며 다그쳤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어떤가. ‘야자때 만화책을 봤다는 이유로 한 시간가량 만화책을 입에 물고 손들고 서있었다. 자습이었던 일본어 수업시간에 다른 과목 교과서를 꺼냈다는 이유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미션 스쿨인 이곳에서 두 번이나 원치 않는 세례를 받았다. 운동장에서 수백여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사랑의 매, 아니 폭력은 얼마나 일상적이었던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5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모교를 찾아본 적 없다. 시간이 흐른 뒤, 학생이 선생님을 폭력행위로 신고해 경찰이 학교로 찾아왔다는 뉴스에서 모교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60일 지났다. 학교에 가는 건 7년 뒤의 일이지만,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 앞선다. 아이를 학원에 안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모두 학원에 가는데, 내 아이만 안 보낼 수 있을까. 학원에 안가는 아이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할까.

얼마 전, 인터넷으로 경기도 양평의 집을 찾아봤다. 단순히 전원생활의 꿈 때문은 아니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가 많다. 아이가 이곳 학교와 자연에서 뛰어놀면, 행복해하지 않을까. 눈 딱 감고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싶다. 하지만 돈 문제도 있고, 서울로의 출퇴근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든 지 오래다. 이 때문에 학교 주변 집값과 전셋값은 치솟았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몇몇 원주민들은 떠나야했다. 새로 지어지는 집 때문에 숲은 파헤쳐졌다. 내 아이를 위한 선택은,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엊그제 한 선생님을 만났다. 혁신학교를 만들고 확신시킨 주역 중 한 사람이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변화시켜요.”

혁신학교의 성공담에는 학부모들이 빠지지 않는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행여 아이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직장 생활이 바쁠 텐데, 그럴 시간이 있을까.

7년 뒤의 일인데, 마치 새달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를 위해 나서볼까?” ‘극성 아빠로의 변신에, 아내는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눈치다.

나와 아이는 밤늦은 시간까지 대치했고, 새벽 겨우 잠들었다. 아내가 이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빠, 아프지 마요.”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아이 사진과 함께. 몸살에 걸려 몸져누운 상태에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포항 처가에 있는 아내가 보낸 것이다. 아이가 내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울컥했다.

아빠가 아파서 미안해.’

지난 주말의 일이다. 일요일 당직 근무를 섰다. 그날 오후 경기도 양주시 마트 화재 사고를 취재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추운 줄도 모르고 맨 손에 취재수첩과 펜을 들었다. 기사를 쓰려고 탁자가 있는 빵집에 들어갔다. 손을 녹이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렸다. 끼니를 대충 빵으로 때우며, 기사를 썼다.

기사를 마무리한 후, 안양으로 향했다. 월요일 쉬면서 집에서 혼자 보내는 것보다 부모님 댁에 가서 맛있는 걸 얻어먹기로 한 것이다. 양주에서 안양까지 지하철로 2시간이 걸렸다. 부모님 댁에 도착한 건 자정에 가까운 때였다. 씻은 뒤, 바로 잠들었다.

이튿날 일어나니, 오한이 느껴졌다. 몸살이었다. 아내가 처가에 간 뒤, ‘기러기 아빠생활을 하면서 최대한 잘 먹으려고 했다. 홀로 지내는 남자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홀로 밥도 잘해먹는 만능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구나 앞으로 아이를 잘 돌보려면, 튼튼한 몸은 필수 아닌가.

그랬던 내가 몸져누웠다. 사실 몸 상태가 나빠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직 근무 전날 오랜만에 술을 진탕 마셨다. 오후에는 집들이, 저녁에는 친구들과의 술 약속이 있었다. 취할 정도로 마셨다. 아주 오랜만에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잠시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니,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였을까.

점심 때, 오랜만에 아들을 본 부모님은 한우를 구웠다. 난 몇 점 먹지 못했다. “병원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에 괜찮아요라며 짜증냈다. 아내와 영상통화를 했다. 내 몰골을 본 아내는 바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조금 뒤 아이의 사진과 메시지가 왔다.

아빠, 병원 갔다 와서 약 먹고 자요. 그래야 낫지요. 아프지 마요.”

아이에게 언제나 멋지고 든든한 아빠이고 싶다. 축구하면 골을 넣고, 야구를 하면 홈런 친 뒤, 아이로부터 아빠 멋있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쁠까. 반대로, 헛발질을 하거나 삼진을 당한다면? 안될 일이다. 내 모습은 여기에 가깝지만. 아이에게 비실비실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아직 아이는 사리 분별을 못하겠지만, 아이의 사진을 보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제야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는 얼른 나아서 아이를 보러 오라고 했다. 주사 맞고 와서는 바로 잠들었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에야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아이의 잠든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사진 속 아이에게 말했다.

네 사진을 보고 힘이 나서, 몸살을 이겼어. 아빠 멋있지?“

아이의 외할아버지가 아이를 꼭 안고 있다.

아이의 엄마가 쓴 글입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젖 물리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유축이나 분유에 익숙해진 아이는 억지로 젖을 물리려는 초보 엄마의 고집에 눈물 콧물을 짜며 세상 떠나가라 울음을 터트렸다.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어찌할 바 모르던 나는 식은땀을 연신 흘려댔다. 그렇게 나는 갓난쟁이와 모유수유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같던 5~6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이는 엄마의 젖을 물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빠가 다 큰 딸아이와 핏덩이 손주의 사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민망한 듯 씨익 웃고는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와 함께 마트에 갔다. 급하게 친정으로 오느라 챙겨오지 못한 유아용품을 사기 위해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마트로 향하던 그때, 무심한 듯 꺼낸 아빠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가 봄이에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

나는 어떤 말로 대화를 이어가야할지 몰라 "…" 하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깐 나의 할머니는 아빠가 돌 무렵 돌아가셨다. 아빠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핏덩이를 업은 채 피난길에 올랐다.

폐가에, 들에, 산에 몸을 숨기며 이어져간 피난길에서 독사는 할머니의 다리를 물었다. 인민군 군의관의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독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다리만 잘라냈어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리를 자르는 대신 결국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독이 퍼진 할머니의 젖을 먹었던 아빠는 오른쪽 눈의 시력이 온전치 못하다.

"아빠가 그때 딱 봄이 정도 됐을 때잖아. 봄이를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 저 핏덩이를 두고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거라…"

어릴 적 시골 어르신들은 아빠를 조금 다르게 불렀다. 아빠의 이름 앞에는 늘 꾸밈말이 붙었다. “불쌍한 여우.” 경상도 어르신들은 영우여우라 부르셨고, 그 이름 앞에는 늘 불쌍한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었다. 마치 불쌍한 여우라는 말이 고유명사인 듯, 아빠는 그렇게 불렸다.

돌도 되기 전에 엄마를 잃은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엄마 젖을 물어야 하는 갓난쟁이가 안쓰러웠을 게다.

30년 넘게 들어온 어르신들의 불쌍한 여우가 마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르게 들렸다. 나에겐 늘 아빠였던 남자가 봄이처럼 갓난쟁이일 때도,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도 있었다는 걸 잊고 살았다. 아빠는 참 외로웠고, 엄마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젖을 직접 빨지 못해 안쓰러웠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며 자책도 했다. 모유를 유축해 먹여도 되고 분유를 먹여도 되는 데 말이다. 그냥 나의 잘못으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 같고, 직접 수유를 하지 않으면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죽하셨을까. 스물여덟. 젊다 못해 어린 엄마는 독이 퍼진 상태에서도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갓난쟁이 아이가 피난길에 먹을 수 있는 건 엄마의 젖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마트에 다녀온 후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엄마 아빠가 아닌, 갓난쟁이의 엄마 아빠, 사춘기의 엄마 아빠, 20대의 엄마 아빠를 떠올려본다. 내 엄마 아빠가 아닌 그냥 이영우, 김순분을.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인 엄마 아빠를.

빛나던 두 분의 젊은 날을 담보로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그리고 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보고 있으니 '엄마 아빠도 나를 키우느라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큼 엄마 아빠도 '보호받고 싶겠구나' 싶다. 이제야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송구스럽다.

- 2015. 1. 31 늦은 밤 엄마가 

내 아이를 품에 안는 건, 감동적인 일이다.

며칠 전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친정으로 갔다. 아이를 위해서다. 난 '기러기 아빠'가 됐다. 아내 품에 안긴 아이를 받아 내 품에 두는 건 퇴근 후의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젠 쓸쓸히 현관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 집은 춥다. 빌라촌 한가운데에 있는 집이라 낮에 볕이 잘 들지 않는다. 추운 건 보일러를 빵빵 틀면 해결된다. 문제는 아이를 씻기는 일이다. 욕실에 딸린 작은 창문은 베란다로 향해있다. 베란다는 이중창이 아닌 탓에, 웃풍이 스며든다. 이곳에서 아이를 씻길 수는 없다.

아이를 위해 처형 네로 피난을 갔다. 아파트는 역시 좋다. 하지만 계속 신세를 질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아내의 몸조리를 돕던 장모님도 곧 내려가야 했다. 고민 끝에, 아내는 전격 포항행을 외쳤다.

곧 아내와 아이가 떠났다. 며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 아내에게 하루 종일 아이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졸랐고, 퇴근하면 영상통화로 아이의 모습을 봤다. 아내에게 집에 가니 좋겠네라고 몇 번 말했다. 날 홀로 둔 채 따뜻하고 편안한 친정에서 아이와 즐거워하는 모습에 샘이 나서 나온 말일 터다.

아내는 딱 한 번, 자신의 모습을 사진 찍어 보낸 일이 있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고 지친 모습이었다. 우스갯소리로 거지꼴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금요일 퇴근 후, 밤 기차를 타고 처가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지만, 하루라도 아이를 직접 보고 싶었다. 새벽이 돼서야, 처가에 닿았다. 우리 부자는 며칠 만에 조우했다. 아이는 무슨 일인가 싶었겠지만, 난 몇 달 만에 아이를 만난 것처럼 부비부비했다.

곧 아이를 내 옆에 두고 잠을 청했다. “오늘 밤은 내가 아이를 볼게.” 그동안 밤잠을 설쳤을 장모님과 아내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 아내, 아이가 한 방을 썼다. 1시간 뒤 아이가 울자, 기저귀를 확인하고 젖병을 물렸다. 며칠 안 했다고, 어색하다. 젖병을 다 비웠지만 아이는 계속 칭얼댄다. 결국 아내가 나섰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 이게 아닌데...’ 처음엔 아이와 밤을 지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 바보아빠니까. 그런데 정작 새벽에 아이가 울자 피곤함에 몸이 무거웠다. 아이를 달래는 아내에게 말했다. “갑자기 피곤하네, 난 좀 잘게.” 그러곤 아침까지 잤다. 아이가 똥을 많이 싸는 바람에 놀란 아내의 비명 탓에 깼다. 아내는 밤을 새웠다고 했다.

오늘 아이를 안고 집안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아이가 며칠 동안 자란 것 같다. 누군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하루 종일 안아 달래고, 끊임없이 먹이고 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멀리서 사진과 영상통화로 바라보는 건 쉽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장모님은 아이를 안고 소파에서 잠이 드셨다. 난 오후에 피곤하다며 드러누웠는데. 참 못난 남편, 못난 사위, 못난 아빠다.

아내와 장모님을 위해, 우리 부자의 관계를 위해, 오늘은 내가 아이를 책임져야겠다. 오늘 밤은 불토.

- 2015. 1. 24 밤 아빠가

아빠가 오래도록 지켜줄게

원래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결국 영상을 봤다. 분노를 가라앉히기 쉽지 않았다. TV에서는 하루 종일 보육교사가 네 살짜리 아이를 때리는 영상을 내보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건만. 아내는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만 보고 싶은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둘째 처조카 예린이도 네 살이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조그맣고 예민한 아이다. 또래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조카와 같은 나이의 아이가 폭력 앞에서 쓰러졌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으니, 아이가 말을 들으니, 보육교사는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영혼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게다.

멀지 않은 미래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을 하는 우리 부부는 한숨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는 봄이 되면 산후 조리를 끝내고 일거리를 구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도우미를 부르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은 새벽 내 노래방을 운영하시기에 아이를 돌보기 힘들다. 결국 우리 부부는 아이를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계시는 포항으로 보낼지 고민하고 있다. 아이를 떠나보내는 게 가슴이 아프지만,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쉽게 결정을 못 내리겠다.

부모와 떨어질 아이한테도 미안하지만,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도 참 죄송한 일이다. 장모님은 지금 서울에 올라와 아내와 함께 아이를 돌보고 계신다. 출근하는 내게는 푹 자라고 하시고, 밤새 칭얼대는 아이를 돌보신다. 장모님의 입술이 터진 지 오래다. 며칠 전 연고와 피로회복제를 사다드렸을 뿐, “저희 부부가 돌볼 테니 쉬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염치없게도 아이를 포항에 보낼까 생각하니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주변의 많은 사람은 엄마가 몇 년간 아이를 돌봐야, 아이 정서에 좋다고 했다. 알고는 있지만, 고개를 쉬 끄덕이기 어렵다. ‘여유가 있다면’, ‘맞벌이를 안 해도 된다면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역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쯤엔 서울로 데려올 생각이다. 장모님께 오래 신세지기는 어려우니 아마 돌 전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것 같다. 의사 표현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하루 종일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게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다. 가격이 싸고 그나마 믿을만한 국공립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싶지만, 대기자가 수백여 명이다.

우리 집 바로 앞에는 가정형 어린이집이 있다. 오다가다 이곳을 지날 때, 어린이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보육교사가 짜증을 내며 아이들을 다그칠 때가 있다. 보육교사도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만, 아이들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까. 아이를 웬만한 어린이집에는 보내지 못하겠다.

우리 아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일까.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이 될 것 같다.

2015. 1. 16 새벽 아빠가


처형네에서 햇볕 받는 아이.

몸무게 4.8kg, 60cm.

태어난 지 한 달,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우리 집을 방문한 간호사가 깜짝 놀랄 정도다. 누굴 닮았는지 허리와 다리가 길어 보인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 "성공했네"라는 말을 듣는다. 눈이 작긴 하지만 가끔 못생겨 보일 때도 있지만, 아이가 아내를 닮는다면 조금씩 잘 생겨질 터다.

아이의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 태어날 땐 3.18kg이었다. 아이는 참 많이 먹는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이맘때의 아이들은 2~3시간마다 80가량의 모유나 분유를 먹는단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120도 꿀꺽꿀꺽 잘 삼킨다. 사레들릴까 걱정이다. 우렁찬 트림과 방귀 소리에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란다. 어찌나 잘 싸는지 하루에 스무 번 넘게 아이의 기저귀를 간다.

요즘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건 '좋은 아빠 되기'. 우선 책과 방송으로 공부했다. 아내와 아이가 조리원에 있을 때, 굳이 도서관에 가서 육아서를 빌려 읽었고, 아빠의 육아를 다룬 EBS <다큐프라임> '파더 쇼크' 편도 봤다. 일할 때 가끔 아빠들의 육아일기를 검색해 읽어보곤 한다.

당장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방법은 아이와 신체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일 터다. 아직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집에 있을 때면 아이를 내 품에 두려고 하고, 아이가 배고파하면 내가 먼저 젖병을 꺼내든다.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들어질 것 같다. 육아 선배들이 한목소리로 "주말에 집에 있는 것보다 회사 나오는 게 더 편하다"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가끔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영화를 보고 싶고, 자전거를 타고 싶고, 책도 읽고 싶다. 얼마 전 아이를 아내에게 맡겨두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신 소맥~”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직 아내에게 얘긴 안했지만, 돌아오는 주말 오래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기로 약속했다. 좋은 아빠가 되는 방법을 알겠는데, 마음먹는 건 쉽지 않다.

지난 주말 처형네에 갔다. 아내와 이이는 집이 넓고 따뜻한 처형네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이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처조카 둘이 있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첫째 유라는 나와 노는 걸을 참 좋아한다. 지난 3년간의 프로젝트로 얻은 결실이다. 3년 전, 나와 아내가 처음 손을 맞잡았을 때 아내는 처형네에 얹혀살고 있었다. 아내는 첫 조카 유라를, 유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모인 아내를 사랑했다.

아내와 처가 식구들의 점수를 따기 위해, 난 유라와 친해지려 부단히 노력했다. 피곤해도 열심히 놀았다. 시나브로 처조카와 이모부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우리와 처형네는 자주 본다. 유라가 빌라 5층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올라와 우리 집 문을 열고 이모와 반갑게 인사한 뒤, 하는 말은 어김없다.

"삼촌, 아니 이모부! 같이 병원 놀이 하자."

주말 처형네 현관문을 열자 유라는 내 옷을 끌어당기며 "놀자"고 했다. 전날 꼬박 밤을 새운 탓에 피곤했다. 선뜻 "그래 놀자"고 못했다. "조그만 쉬었다 놀자", "우리 밥 먹고 놀자“...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밤이 돼서야 같이 놀았다. 얼마 못 놀고 유라는 침실로 향했다.

늦은 밤 처형으로부터 유라의 기다림을 들었다.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유라는 나를 기다린다면서 현관문 앞에서 계속 서성였단다. 나와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해 하기 싫은 숙제도 후딱 해치웠단다. "나는 이모무랑 노는 게 정말 좋다"고 했단다. 가슴이 먹먹했다. 미안했다. 피곤하더라도 더 많이 놀아줄 걸 그랬다.

좋은 이모부가 돼야겠다. 피곤하더라도 조카의 마음을 헤아려야겠다. 그렇게 좋은 이모부가 된다면 어느새 좋은 아빠가 되는 길도 쉬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2015. 1. 12. 저녁 아빠가

아이의 작은 발, 앞으로 건강하게 자라길.


1231일의 일이다. 늦은 밤까지 칭얼대던 선율이가 잠이 든 건 새벽 2시가 지나서였다. 그제야 잠깐의 평온이 찾아왔다. 아이는 어김없이 3시간 뒤 큰 소리로 울어대며 깰 것이다. 그때까지 잠을 자둬야 한다. 피곤에 찌든 우리 부부는 얼른 불을 끄고 누웠다. 모유 수유로 지친 아내에게 아이가 울면 유축해놓은 모유를 먹이겠으니, 푹 자라고 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난 잠들지 못했다. 아이의 숨소리 때문이다.

그르렁, 그르렁...

코가 막혔는지 숨을 거칠게 쉰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르렁 소리가 사라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도 모르게 몸이 튕겨져 나가, 아이의 얼굴에 내 얼굴을 묻었다. 숨결이 느껴진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쉰다. 다시 그르렁, 그르렁. 걱정이 커진다.

그렇게 몇 번이나 진땀을 뺐는지 모르겠다.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배고파 깨어난 아이는 아내가 유축해놓은 모유를 먹고도 계속 보챘다. 어르고 달래도 아이는 낑낑 대며 잠들지 못했다. 아이도 나도 불면의 밤을 보냈다. 새벽 6시쯤 난 장렬히 전사했다. 아내에게 칭얼대는 아이를 떠맡긴 채.

요새 우리 아이가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할 때가 있다. 아이들은 생후 100일까지 엄마의 면역력을 지니고 있어 크게 아프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다행히 건강하다. 그럼에도 그르렁거리며 숨 쉬는 아이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비염이 있는 아내는 아이의 거친 숨소리가 자기 탓인 것 같다며 마음 아파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아내가 처음 눈물을 흘린 것도 아이의 그르렁 탓이다. 아이는 조리원 신생아실에 있을 때부터 숨을 힘들게 쉬었다. 아이 얼굴 옆에는 항상 젖은 손수건이 놓였다. 조리원에서는 아이가 열도 없고 분유도 잘 먹으니 아픈 게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를 다른 아이들로부터 떼어놓아 구석진 곳에 눕혔다.

특히, 한 조리원 선생님은 아내가 방을 건조하게 해놓은 탓이라고 말했다. 그날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늦은 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처형과 오랜 통화를 한 후에야 잠이 들었다. 아내는 이후 조리원을 찾은 소아과 의사로부터 "아이는 아픈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숨을 돌렸다.

아이가 집에 온 후, 우리 부부는 유명한 코 세정제 피지오머를 사용했다. 다소 효과가 있지만, 아이는 다시 그르렁거린다. 적정 온·습도를 맞추고 코막힘에 좋다는 올바스 오일을 가습기에 넣고 사용하지만, 그르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종종 아이의 얼굴이 시뻘게지는 모습에 화들짝 놀랜다. 다른 아이도 이런 행동을 하지만, 우리 아이는 더 자주하는 것 같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아내는 병원에 가보자고 한다. 아이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에도 신경이 쓰인다. 다들 아이를 키우면서, 아픈 아이를 업고 새벽 응급실을 여러 번 찾는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떨릴까.

새해가 밝자 소원 하나를 빌었다. 우리 아이, 안 아프고 건강하게 크게 해달라고. 차라리 내가 아프도록 해달라고.

- 2015. 1. 3. 저녁 아빠가

모유수유를 위한 젖꼭지.


아들 바보. 선율이 바라기인 내 모습에 장모님이 지어준 별명이다. 아이를 품에 안으면, 절로 흐뭇해진다. 그런데 이제는 아들 바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미안한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자정을 훌쩍 넘긴 지금, 젖을 짜내고 있는 아내를 보면 말이다.

아이만 계속 보고 있네요. 그렇게 좋아요?” 아내로부터 몇 번이나 들은 말이다. “, 너무 귀여워요.” 오늘 아내의 질문은 조금 달랐다. “힘든 건 난데, 왜 아이만 안고 있어요?” 난 쉽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당신이 덜 힘들 테니까요.” 겨우 찾은 대답은 궁색했다.

조리원에서 나온 뒤, 아내가 섭섭했다. 아내는 아이와 관련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엄마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조심조심 아이의 기저귀를 갈 때, 아내는 왜 빨리 갈지 않아요.”, “애 다리를 너무 팍 치켜드는 것 아니에요?”라고 다그친다.

아이의 속싸개를 살 때, 아내는 애 추운데 빨리 싸줘요라며 날카로움이 가득 담긴 말을 내놓는다. ‘나도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내의 말에 소심한 나는 상처를 받는다. 그럴 땐 언짢은 기분을 숨길 수 없나 보다. 쌀쌀해진 내 태도에 아내는 왜 나한테 냉랭해요?”라고 묻고, 난 "아니에요"하며 자리를 피한다.

아내는 오늘 출산을 한 뒤, 내 멘탈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출산의 고통은, 임신의 끝이기도 하지만, 육아의 시작이기도 하다. 겨우 며칠 아내의 육아를 도운 남편 입장에서 육아는 참 힘든 일이다. 아내의 육아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기도 하다. 지금껏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오늘 아내의 말에 내 마음도 이를 깨달았다.

아내는 분유를 최대한 적게 먹이고 최대한 모유 수유를 하기로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다. 많이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있는 힘껏 젖을 빤다. 그만큼 아내의 젖꼭지는 상처를 입는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다. 아이는 2~3시간 마다 젖을 빤다. 상처는 계속 덧난다. 너무 아파서 수유나 유축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옷 밖으로 내놓고 있다. “분유를 더 많이 먹이자는 나의 제안에도 아내는 모유 수유를 고집한다.

모성애는 세다. 아이는 배고프면 울고, 기저귀가 젖으면 운다. 새벽에도 2~3시간 마다 아이는 힘껏 운다. 난 쉽게 깨어나지 못한다. 아내는 일어난다. 나도 새벽에 일어난 적이 있다. 2시간 동안 달랬지만 아이는 계속 칭얼댔다. 난 어느 순간 난 잠들어버렸다. 아내는 끝까지 아이를 책임졌다. 새벽 어스름 아이는 또 울었고 아내가 깨어났다.

아이를 낳은 뒤, 아내의 삶은 사라졌다. 아내는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내의 날카로움과 예민함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일은 아내가 겪고 있는 일들에 비하면 참 쉬운 일이다. 아내의 짜증을 언짢게 여겼던 내가 부끄럽다. 아들 바보가 아닌, 아내 바보가 돼야겠다. 아이가 언젠가는 아내의 고된 날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 2014. 12. 31 새벽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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