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쓴 글입니다.

2주 전, 포항 친정집으로 왔다. 이유는 많았다. 부정맥 진단으로 우울해진 아빠가 아이를 보고 싶어 하셨다. “아이가 있으면 웃을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엄마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인의 결혼식도 있었다. 결혼식은 부산이었지만,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나니 부산쯤이야 옆 동네처럼 느껴졌다. 마감을 한참 넘긴 일거리도 마무리해야 했다. 낮 시간에 엄마가 아이를 잠시만 봐줘도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쉬고 싶었다. 누군가 아이 낮잠만 재워줘도, 아니 분유만 한 번 먹여줘도 살 것만 같았다.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한 한의원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 엄지손가락부터 시작된 통증이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번졌다. 급기야 아이를 안는 게 두려워질 정도였다. 엄마들의 손목, 무릎, 어깨 통증을 익히 들어온 터라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매번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엔. 난 그리 기억력이 좋지도, 침착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울면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과 손목에 무리가 가도록 안았고, 수유를 할 때나 원고 작업을 할 때면 거북이 목을 하고 어깨에 통증을 가중시켰다. 결국 남편의 연차 휴가일에 아이를 맡기고 한의원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아픈 거 같아요?”

아이를 안아서요?”

맞아요. 최대한 쓰지 말아야 해요.”

누가 모르나요. 헌데 우는 아이를 그냥 둘 순 없지 않은가.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한의사도 멋쩍어 웃었다. 안 되는 걸 모를 리 없으니 말이다.

남편 퇴근 시간이 어떻게 돼요?”

들쑥날쑥이라.”

화요일, 목요일에 야간진료하니깐. 8시까지 꼭 오세요. 그렇게라도 진료 받아야지, .”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알겠다고 답했지만 그 날 이후로 한의원을 가지 못했다. 남편의 퇴근이 늦은 날도 있고, 못다 한 살림을 하느라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다. 틈만 나면 "한의원 가라"는 남편의 말에도, 남편의 퇴근 후 홀로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이 어찌나 달콤한지, 쉬이 엉덩이를 떼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다 포항으로 왔다. 부모님은 생글생글 웃는 손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밀린 원고도 3일 만에 끝냈다. 엄마가 아이를 업고 낮잠을 재워주실 땐, 나도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의원을 갈 수도 있었다.

애기 혼자 봐요?”

도와줄 사람 없어요?”

서울 언제 가요?”

서울 가면 또 혼자 애기 보겠네?”

한의사와 간호사들은 내가 한의원에 갈 때마다 되물었다. ‘왜 이렇게 돌아가며 같은 질문을 하나싶다가도 왠지 고맙기도 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3개월이 넘어서도 체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꾸 축축 늘어지고 온 몸엔 힘이 빠졌다. 겉으론 멀쩡한데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나 약 좀 먹을래를 외쳤고, 결국 엄마에게서 흑염소를 득템했다.

육아는 체력전이라던 선배 맘들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린 대가였을까. 아이를 낳기 전에 체력을 키웠어야했는데, 내가 직접 겪지 않으면 그 말의 뜻을 체감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손목과 어깨 통증도 그렇다. 친구들은 아이를 안는 방법부터, 손목보호대를 꼭 착용하라는 충고까지 귀가 닳도록 말해줬다. 하지만 실전에 돌입하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결과 내 손목과 어깨는 이 모양 이 꼴이 됐다. 어깨는 너무 아파 밤잠을 설칠 정도다.

다행히 2주간의 치료로 통증은 많이 호전됐다. 하지만 육아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올라가면 애기 맡길 때 없죠? 치료받으러 가기도 힘들겠네. 지금이 한참 힘들 때야. 한참. 애기 좀 더 크면 괜찮아질 거예요.

손목과 발에 꽂혀 있던 침을 빼며 던진 간호사의 말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다들 하는 육아라지만, 다들 힘든 육아라지만, 누군가가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에 다들 하는 육아라, 다들 힘든 육아라, 차마 엄살을 피우지 못한 마음에 따뜻한 위로가 됐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나라에서 출산 연령을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며 침을 튀기기도 했다.

아이를 낳을 사람들을 미리 신청 받아서, 20대에 자기가 원하는 시기에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기를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아이는 팔팔한 20대가 키워야지 30대가 넘으면 본인도 힘들고 나라도 손해다.”

뭐 이런 되도 않은 소리를 외치며 누가 누가 더 힘드나를 경쟁했다. 아이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 , 을 키우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정말 경의를 표한다.

이제 갓 5개월 신입 맘에 접어든 나는 이 길을 걸어간 선배 맘이 참으로 대단하고, 이 길을 걸어갈 후배 맘이 참으로 걱정이다. 오지랖도 풍년인지라 육아는 체력이란 말을 꼭 후배 맘에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한 번 집 나간 손목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세상의 엄마들, 파이팅!

5개월 차 아이는 이제 손을 양쪽으로 쭉 펼칠 수 있다.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녀왔다. 카셰어링을 통해 차를 빌렸다. 돈은 좀 들었지만, 편하게 다녀왔다. 문제는 차를 집 앞에 세운 뒤였다. 아내는 아이를 안았고, 나는 젖병, 보온병, 기저귀, 물티슈, 도시락통 등이 든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나머지 한 손에는 유모차와 카메라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5층을 걸어 올라갔다. 헉헉 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년 전 우리 부부는 서울 북가좌동 5층 빌라 꼭대기 층에 신혼집을 차렸다. 빚을 최소화해 작은 집을 얻고, 나중에 돈을 모아 넓은 집으로 가자고 약속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건, 젊은 신혼부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에 1억 원이 안 되는 전셋값으로 깨끗한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생각에 다리 아픈 줄 몰랐다. 운동도 된다고 생각하니,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참 죄송한 일이다. 보통 5층을 걸어 오르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오르시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무거운 택배를 5층까지 배달해주는 택배기사님도 안쓰럽다. 아내가 냉장고에 택배기사님들을 위한 음료수를 준비해놓았다.

아이가 태어난 뒤, 우리 부부에게도 5층을 오르내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갓 5개월에 접어든 아이와 외출할 때면 짐은 한 보따리였다. 계단을 내려갈 땐 그나마 낫다. 8kg가 넘는 아이를 안은 아내는 5층을 오르며 적어도 두 번은 멈춰 서 숨을 돌려야 했다.

아이가 클수록 아내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나 역시 짐을 여러 차례 오르내려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우리 부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유모차를 1층에 놔뒀다. ‘누가 가져가진 않겠지...’

다리 힘은 어찌나 세졌는지. 발차기 맞으면 아프다^^

결국 우리 부부는 이사 가자고 외쳤다. 는 8월 전세계약을 끝으로 신혼집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되도록 엘리베이터가 있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넓은 집으로 가려 한다. 빚은 꽤 내야할 것 같다. 선택지는 작은 아파트나 최신 빌라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식구는 어디로 가야할까. 난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좋다. 동네에 정이 들었다. 불광천이 멀지 않아, 언젠가 아이를 트레일러에 태우고 한강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회사에서 가깝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육아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아내도 가을엔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다. 간혹 우리 부부가 어려울 때 아이를 돌봐줄 곳이 필요하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니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본가는 안양이지만 부모님이 밤늦은 시간까지 노래방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아이를 돌봐줄 수 없다. 처가는 포항이다. 아이를 포항에 내려 보낼까 고민도 하지만, 이 역시 쉬운 결정이 아니다.

아내에게는 서울 우이동에 제2의 처가가 있다. 바로 처형네다. 직장맘인 처형은 8살과 4살 딸들을 시댁의 도움을 받아 키우고 있다. 이곳에 가면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아이들끼리 자주 어울릴 수 있으니.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우리가 원하는 작은 아파트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빌라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이동으로 가면 아내와 내가 길바닥에서 버리는 시간이 많아진다. 내가 사랑하는 한강에서도 멀어진다. 고민이 깊어진다.

결정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 우리 세 식구의 집은 어디가 될까. 정들고 한강이 가까운 북가좌동일지, 처형이 있는 우이동일지, 아니면 우리 예산에 맞춘 제3의 곳일지. 우주는 아이를 중심으로 돈다. 아이를 중심에 두고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아이와 처조카 유라·예린이를 사진에 담았다.

우리 부부는 기념사진에 무덤덤하다. 결혼할 때 다들 찍는 스튜디오 웨딩 촬영도 하지 않았다. 잔뜩 차려 입고 스튜디오에서 사진 찍을 생각에 손발이 오글거렸다. 아내도 나도 를 외쳤다. 대신 아는 사진 기자 선배에게 우리의 한강 데이트를 카메라에 담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때 찍은 사진이 우리 집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우편물 더미에 가려 제 모습이 보이진 않을 뿐이다.

지난해 12월 아이가 태어났다. 남들은 아이의 손·발 도장을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 부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이의 탯줄은 조리원에서 주니깐 받았다. 서랍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의 출생증명서, 출생신고를 한 직후 받은 주민등록등본은 조심스레 봉투에 넣어 서랍에 뒀다. 제 자리에 있겠지?

그런 나에게도 욕심을 부리고 싶은 게 생겼다. 바로 아이 사진이다. 처음엔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었다. 꽤 괜찮게 나왔다. 하지만 더 좋은 화질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인쇄해서 액자에 넣으려면 좋은 카메라가 필요한 게 아닌가(물론 지금까지 내가 찍은 아이 사진을 인쇄한 적은 없다.)

아내가 조리원에 있을 때 나도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아이 50일 사진을 공짜로 찍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더 알아보니, 사진 촬영 업체의 사업 노하우였다. 100일이나 돌 사진을 찍기 위해 50일 사진을 공짜로 찍어준다는 것이다. 아내는 50일 사진을 찍지 말자고 했다. 나는 망설였다. ‘화질 좋은 아이 사진 몇 장을 남겼으면 좋겠는데...’

결국 아내는 내 뜻을 받아들였고, 50일 사진을 찍었다. 참 잘 나왔는데, 뭔가 맘에 들지 않았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건 역시 손발을 오글거리게 한다. 무엇보다 대량생산 느낌이 났다. 사진 속 아이만 우리 아이지, 나머지에서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평소 일상 속 아이 사진을 찍자고 다짐했다. DSLR 카메라는 아니지만 요새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였다.

어느 날 엄마가 아내에게 아이 100일 사진을 언제 찍을 거냐고 물었다. 아내는 찍지 않을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돌아온 엄마의 말. “그래도 예쁘게 몇 장 찍어야지.” 아직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쪽은 시어머니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예전 같았으면 내가 엄마한테 안 찍을 거예요라고 했을 텐데, 끔찍한 손주 사랑을 인생의 낙으로 느끼는 엄마에게 굳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스튜디오 100일 사진은 싫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곳도 있다. 사진을 보니 참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다들 집들이 어찌나 으리으리한지. 가격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이런 고민이 깊어갈 때, 처형네에서 며칠 지냈다. 처조카들이 이모를 애타게 찾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내는 "여기서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아마 시어머니 말이 걸렸을 것이다. 업체에서 100일 사진을 찍는 게 탐탁지 않으니, 아이와 처조카들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난 카메라를 꺼냈다.

정면은 아니었지만 창밖에서 실내로 햇빛이 들어왔다. 역광인 셈이다. 몇 컷 찍었다. 베란다가 배경이라 사진이 예쁘지 않았다.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찍는구나. 망했다.' 많은 사진을 찍고 확인해보니, 어랏! 의도한 건 아니지만 뭔가 그럴듯한 사진이 나왔다. 배경은 환한 빛으로 처리됐고, 그 속에서 아이들이 빛났다.

그렇게 수십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대단히 잘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아이의 100일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앞으로 아이 사진을 많이 찍어야지!’ 사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사진을 취미로 둔 모든 남편들이 그렇듯 아내에게 좋은 렌즈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사진 촬영을 준비할 때, 찰칵!

아마 저처럼 아이 사진을 찍을 카메라를 고민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네요. 우선 제 카메라는 소니 a6000입니다. 렌즈는 일명 카페렌즈’(SEL35F18)라 불리는, 아주 밝은 단렌즈입니다.

몇 년 전, 100만 원을 넘게 주고 산 DSLR 카메라와 렌즈를 잃어버린 후, 카메라에 대한 신경을 껐습니다. 그때 화질에 만족했지만, 너무 무거웠던 기억이 생생했죠. 그 뒤로는 카메라는 무조건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뒤 디카도 들였고, 아이폰6와 같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아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실내에서는 어둡거나 흔들립니다. 배경흐림도 잘 안되죠. 그래서 미러리스 카메라가 뜨는 모양입니다. DSLR은 무겁고,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만족하지 못하니까요.

캐논이나 니콘에서도 더욱 가벼운 DSLR을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더 가벼운 미러리스를 골랐습니다. DSLR에 대한 향수가 있었지만, 성능이 비슷하다고 하니 고민이 길지 않았죠. 렌즈에 신경을 썼습니다. 밝은(조리개값이 낮은) 렌즈를 골랐습니다. 그래야 어두운 집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까요. 배경흐름 효과도 기대했죠. 여러 미러리스 중에서 가격과 센서 크기 등을 고민해 지금의 카메라를 골랐습니다. 저는 이 카메라와 최고의 휴대성을 자랑하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아이 사진을 찍고 있답니다.

아이 안고 변기에 앉았어요.”

얼마 전, 아내는 충격 고백을 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짠했다. 주말이나 휴가 때 아이를 돌보면서, 단 한 순간도 맘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는 우는 아이를 업고 식탁에 선 채 밥을 먹어야했고, 갓 잠든 아이를 깨울 수 없어 아이를 업은 채 화장실에 가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장난감이다. 아이가 10분이라도 장난감에 정신을 빼앗긴다면, 엄마 아빠는 숨을 돌리거나 밀린 집안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장난감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모빌에 잠깐 관심을 둘뿐, 계속 놀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곧 울음을 터트린다.

지난해 12월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 뒤, 페친이 아이가 쓰던 아기체육관을 분양했다. 많은 이들이 신청했다. 검색해보니, 인기 있는 장난감인 것 같아 나도 손을 들었다. 운 좋게도 당첨됐다. 아기체육관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걸 그 뒤에 알았다. 아기체육관 앞에 국민이라는 글자가 붙었으니까.

아기체육관은 생후 3개월부터 쓸 수 있다고 해서, 쓱쓱 닦아놓은 뒤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는 생후 3개월을 맞았지만 아기체육관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결국 우리 부부는 우리의 체력으로 아이와 놀아줬고,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토요일, 아이를 데리고 아내의 친구 집에 놀러갔다. 아내 친구에겐 17개월된 딸 하윤이가 있다. 긴 연륜답게, 꽤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아기체육관과 비슷하면서도 복잡한 에듀테이블이란 장난감이 있었다. 아내의 친구가 아이를 그 앞에 뒀다. 아이는 버튼을 누르며 관심을 보였다. 곧 아이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들리는듯 했다. ‘아빠, 이거 사주면 안 돼?’ 아이는 내 텔레파시 답변을 들었을까. ‘집에 아기체육관 있잖아.’

지금껏 우리 돈으로 산 장난감은 거의 없다. 대부분 처형이나 다른 육아 선배들한테 물려받았다. 여기에 아이가 어려 아직 장난감을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과 맞물려, 장난감을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관심을 두는 장난감이 생기니, 고민이 깊어졌다. 사줘야하나. 일요일 내가 아이를 돌볼 때, 아내는 노트북으로 에듀테이블을 검색했다.

가격은 6만 원을 웃돌았다. 나는 천천히 알아보자고 했고, 아내는 나도 여유롭게 밥 좀 먹고 싶어요. 사면 안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도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집에 있는 아기체육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일요일엔 집안일로 바쁘다. 아이를 돌보는 일을 빼더라도, 청소와 빨래, 요리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부부가 밥을 먹기 위해 거실을 비우자, 아이는 어김없이 찡찡거렸다. 급한 마음에 범보 의자에 앉은 아이 앞에 아기체육관을 뒀다.

어라? 아이가 아기체육관에 흥미를 보였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이 흘렀다. 아, 드디어 우리 집에도 봄이 오는구나!

아내의 또 다른 친구는 얼마 전 쏘서를 대여한 후, 처음으로 여유롭게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고 했다. 쏘서가 뭔지는 모르겠다. 아기체육관, 에듀테이블, 범보 의자, 쏘서... 이제 나도 아이 장난감 세계에 빠져들었다. 장난감이 우리 부부를 구원해주겠지. 검색해보니 생후 6개월 된 남자 아이한테는 점퍼루가 최고란다. 곧 점퍼루를 대여하러 가야겠다.


아이를 잠시 재워놓고, 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며칠 전 처형이 아내에게 한 말이다. 처형은 워킹맘(직장맘)이다. 여덟 살, 네 살 두 딸을 잘 키우고 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원더우먼이다. 처형이 잠, 휴식, 친구 등 많은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원더우먼도 가끔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날 오전 처형은 어린이집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 예린이가 열이 있는데다 밥도 먹지 않고 하염없이 울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처형에게 예린이를 일찍 하원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다. 벌써 그 주에만 두 번째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예린이가 새로운 반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일주일동안 일찍 하원시키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처형에게 전했다.

처형은 이번 달 이미 여러 차례 휴가를 냈다. 첫째 유라가 초등학교에 입학함에 따라, 챙길 게 많았던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조퇴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처형은 고민 끝에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아내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일을 하고 있는 예린이의 할머니가 예린이를 돌보기로 하면서, 처형은 위기를 넘겼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위기의 순간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까.

처형이 겪은 일은 모든 워킹맘들의 얘기이기도 하고, 당장 우리 부부의 가까운 미래다. 우리 부부는 당장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 처가는 포항에 있고, 안양 본가의 부모님은 새벽까지 노래방을 하신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급하게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 오롯이 우리 부부가 감당해야 한다.

아내는 2주 전부터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를 위해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찾았다. 아내는 아이도 돌보고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가 잘 때 아내가 일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엄마 손이 필요했다. 아내는 앉아서 밥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내는 낮에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본 뒤, 내가 퇴근한 후에야 숨을 돌렸다. 하지만 저녁에 잠깐 일하는 걸로는 원고 마감일을 지킬 수 없었다. 체력은 떨어지고 잠은 부족한 날들이 이어졌다. 마감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아내는 결국 내게 하루만 휴가를 내고 아이를 봐달라고 했다.

그때 내 대답은 어려운데였다.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단 걸 알았지만, 회사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그날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책임감을 느끼는지 알아요. 그런데 나는 마감일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육아도 함께하고 일하는 것도 도와준다고 해놓고선 결국 나만 동동거리고 있잖아요."

아차 싶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육아를 열심히 돕는 남편이라 자처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난 급하게 며칠의 휴가를 냈고, 아내는 서둘러 원고를 마감했다. 아내는 지금까지 마감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 원고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출판사에서 한 소리를 들은 뒤, 아내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못 다한 일이 머릿속을 맴돌고, 일을 하고 있으면 좀 더 안아주지 못해 아이에게 미안하고. 도대체 이게 뭔지. 내가 일을 너무 빨리 시작했나봐요."

나는 지금껏 세상의 수많은 원더우먼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더우먼들은 속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엄마들에게 왜 원더우먼이 되지 못하냐고 다그친다. 나도 내 아내가 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 원더우먼이 되길 바랐다. 생각이 짧았다. 아내에게 약속해야겠다. 곧 슈퍼맨이 우리 집에 날아들 거라고.

이때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오늘은 바람이 좀 불었지만, 햇볕이 따사로웠다. 미세먼지가 심각한 날인 줄도 모르고, 아내에게 불광천을 걷자고 졸랐다. 마음은 이미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를 자전거 뒤 유아용 트레일러에 태우고 한강으로 향한 지 오래다.

그제 회사 선배에게 받은 유모차를 닦고 시트를 빨았다. 그날 아이를 데리고 불광천에 다녀왔다. 아빠와 아들의 첫 데이트는 순조로웠다. 그때의 자신감 때문인지 나들이에 조심스러운 아내에겐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아이 엄마가 가방에 기저귀, 젖병, 분유, 따뜻한 물을 넣는 동안, 철없는 아빠인 난 사진기를 챙겼다. 집 밖으로 나와 물티슈를 챙기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무슨 대수랴.

불광천으로 향하는 길, 바람이 생각보다 거셌다. 아내의 걱정은 컸지만, 난 유모차를 거침없이 앞으로 밀었다. 아이는 유모차 안에서 조용히 세상 구경을 했다.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0분가량 걷다보니 배가 고파왔고, ‘피자가게가 보였다. ‘기저귀를 갈아야할 때는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구석이나 화장실에서 갈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가족은 가게의 구석진 곳에 앉았다. 유모차를 테이블 옆에 두고 아이를 살폈다. 좀 칭얼대자 기저귀를 봤더니 젖어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아이의 기저귀를 빠른 속도로 갈았다. 아이는 싱글벙글 웃었다. 난 아내에게 아이를 가리키며 효자가 났어요. 외식하러 나왔는데 엄마 아빠 밥 잘 먹으라고 조용히 앉아 있네요라고 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면, 우리 부부가 고상하게 피자를 먹을 시간이 확보될 것 같았다. 아내가 분유를 먹이는 사이, 피자가 도착했다. 피자를 잘라 아내에게 먹였다. 참 행복한 모습이 아닌가. 아이의 트림을 위해 내가 아이를 안았다. 옆 테이블 사람들의 시선은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고 귀여워, 안고 싶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이를 더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냄새가 났다. ‘, 아니야, 잘못 맡은 거겠지. 피자나 먹자.’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내려놓았다. 아이에게 웃음을 보여주고는 포크로 피자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아내의 외마디 비명. “, 쌌네!” 하얀 바지 엉덩이 쪽에 황금빛, 아니 누런 얼룩이 졌다. 우리 부부는 멘붕에 빠졌다. 먼저 각자의 접시에 담긴 피자 한 조각을 한 입에 먹어치웠다.

아내에게 집에 얼른 들어가서 해결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의 엉덩이가 짓무른다며 이곳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한테 물티슈가 없었다. 점원에게 손 닦는 데 쓰는 물티슈 여러 장을 부탁해 받았다. 아내는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화장실에서는 다행히 기저귀 교환대가 있었다.

아내는 아이를 눕히고 바지를 내렸다. 아내는 경악했다. 뒤에 그 상황을 대참사로 표현했다. 기저귀가 감당 못할 정도였으니, 바지까지 흘러내린 것이다. 작은 물티슈 몇 장으로 아이 엉덩이를 닦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화장실 휴지로는 어림없었다. 그렇다고 세면대에서 아이의 엉덩이를 닦을 순 없었다. 결국 아내는 결단을 내렸다. 손에 물을 묻힌 뒤, 아이의 엉덩이를 닦은 것이다.

그 순간, 화장실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당황한 아내는 아이의 기저귀를 채우고 똥 묻은 손을 급하게 물티슈로 닦고 물로 씻었다. 야속하게도 사람들은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몇 개월이나 됐어요?”, “애기야, 엄마 손 씻으니 조금만 기다려아내는 아이가 다리를 들어 누런 얼룩의 바지가 보일까봐 전전긍긍했다. 아내는 건성으로 답하며, 천기저귀로 아이를 감싼 후 화장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 부부는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서둘러 집으로 왔다. 그제야 숨을 돌렸다. 아내가 욕실에 따뜻한 물을 받는 사이, 난 아이의 바지를 벗겼다. 그 순간 아이는 오줌을 발사했다. 아내는 손에 똥을 묻혔고, 나는 오줌을 맞았다. 잊지 못할 우리 가족의 첫 나들이였다.


재벌가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더 어울렸을 포즈. 너 아빠한테 항의하는 거지?

어제의 일이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서울 서대문구 집에서 출발해, 경기도 안양시 본가로 향했다. 여기서 질문. 우리 세 식구는 어떻게 갔을까.

직접 차를 몰고 가면 좋겠지만, 차가 없다. 아 참, 근처에 사는 친한 형에게 15년 된 아반떼를 빌릴 수 있다. 하지만 형도 세 살배기 딸을 데리고 처가에 간 탓에 차를 빌릴 수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을까.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기 전, 전철을 이용했다. 6호선 증산역에서 탄 뒤, 합정역(6호선2호선)과 신도림역(2호선1호선)에서 갈아타고 석수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갓난아이는 이 여정을 소화하기 힘들 것이다. 아이를 안고 짐을 잔뜩 든 우리 부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택시는 어떨까. 2만 원가량의 요금이 나오겠지만, 자주 타는 게 아닌 이상 큰 부담은 아니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손님을 빨리 데려다주고, 다음 손님을 받아야 한다. “천천히 가주세요라고 해도 과속방지턱을 사뿐히 넘는 택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얼마 전 갓난아이를 안고 택시를 탄 아내는 앞으로는 되도록 택시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이쯤에서 정답을 공개해야겠다. 서울역까지 처형네 차를 얻어 탄 뒤, 서울역에서 광명역까지 KTX를 이용했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차로 10. 아빠가 마중 나왔다. 또 다시 질문. 집으로 돌아갈 땐 어떻게 갔을까. 우리 손에는 아이의 100일상에 올라간 떡, 잡채, 각종 반찬이 들렸다. 결국 동생이 나섰다. 부모님 차로 우리를 태워줬다. 동생은 다시 안양으로 가 부모님께 차를 돌려주고, 서울 금천구의 집으로 향했다.

참 미안한 일이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아이와 함께 이동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차가 없는 탓에, 마땅한 교통수단을 찾기 힘들다. 결국 다른 누군가를 수고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많지 않다.

차를 살까.

차를 최대한 늦게 사고 싶다. 작은 전셋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소원은 더 넓은 집, 더 좋은 집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 차를 산다면, 우리의 꿈은 몇 년 미뤄질 것이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한다. 차가 있다 해도 꽉 막히는 출퇴근길에는 대중교통을 타는 게 여러모로 낫다. 주말이라고 항상 어디론가 가는 건 아니다. 결국 차를 세워두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험료나 세금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수천만 원을 들여 주차장에 차를 전시할 의도가 아니라면, 차를 사는 건 실용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차를 사는 데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막대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차를 사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칠 것이다. 친한 형한테 차를 빌리는 것도, 처형네 차를 얻어 타는 것도, 아빠나 동생에게 태워달라는 것도 참 미안한 일이다.

차를 사야할까. 곧 이사도 가야 하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돈도 많이 들어갈 텐데. 고민이 깊어진다.

커서도 외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아이가 태어난 지 89. 그동안 아내·아이·나 이렇게 우리 세 가족만 모여 하루를 보낸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대부분 장모님이 함께 했다. 그 전에 어머님은 포항에서 아버님과 잘 지내시고 계셨다. 지난해 12월 아내가 아이를 낳기 며칠 전, 어머님은 짐을 싸들고 서울에 올라오셨다.

어머님은 아내 수발을 들었다. 출산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먹였고, 아내와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매일 집안 청소를 하셨다. 여기저기서 받은 아이 옷과 용품을 유아용 세제로 빨고 닦았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님은 직접 갈아 만든 바나나 우유를 건네주셨고, 출근 직전에는 나를 붙들고 식탁에 앉혔다. 퇴근하면 어머님이 차리신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같은 시각, 아버님은 홀로 식탁에 앉으셔야 했다.

아내가 아이를 낳은 뒤, 어머님은 병실의 아내 침대 옆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으리라. 3일 뒤 아내는 조리원에 들어갔고, 그제야 어머님은 포항으로 내려가셨다.

아내가 조리원에서 나올 때쯤, 어머님은 다시 올라오셨다. 한겨울 겉싸개 속 아이를 안고 집으로 내달린 건 어머님이었다. 이때부터 네 식구의 동거가 시작됐다. 침대방은 내 차지였다. 아침마다 출근을 해야 하니 편하게 자라는 어머님 말씀 때문이었다. 어머님과 아내가 새벽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아이의 똥을 처리하는 일도 아이를 목욕시키는 일도 어머님이 전담하셨다. 아이가 지금껏 건강하게 클 수 있었던 건 어머님 덕이다.

어머님은 꽤 힘드셨을 것이다. 며칠 전, 난 아이와 함께 밤을 보냈다. 아이는 2~3시간마다 깼다. 기적이 일어난다는 생후 100일에 가까워지는 탓인지 비교적 수월하게 분유를 먹이고 트림이 나오도록 한 뒤, 아이를 눕혀 재울 수 있었다.

20여분 만 고생하니, 나도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날 새벽에 깬 시간을 합치면 1시간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날 너무 졸려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낮잠을 자도 피곤은 풀리지 않았다.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환갑을 바라보는 어머님은 오죽했으랴. 어머님은 아이를 돌본 지 며칠 만에 입술이 터졌다.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나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 같다. 33(10)의 작은 집, 그곳에서도 아주 아담한 거실에서 사위와 지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다. 저녁마다, 그리고 주말엔 온종일 사위와 함께 좁은 공간에 있으면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어머님은 나보고 쉬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죄송해, 몇 번 설거지를 했다. 나중에 어머님이 나를 칭찬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고백할게요

외할머니와 아이는 '절친'이다.

사실 어머님 탓에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이 아니었으면 불면의 밤을 보냈을 텐데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럽다. 난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으려고 한다. 조용히 라디오를 들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어머님이 오신 뒤에 텔레비전을 끌 수 없었다. 서울의 작은 딸 집에서 어머님의 유일한 낙은 아마도 텔레비전 시청일 것이다. 난 무심코 텔레비전을 껐다가 아내에게 혼나기도 했다. 철없는 사위다.

어머님과 같이 지내면서 가장 불편한 것은 생리현상이다. 아내와는 오래 전에 방귀를 텄다’. 어머님과 지내면서 가끔 급하게 방귀를 분출할 때가 있었다. 처음 몇 번은 간신히 소리를 숨길 수 있었고 급박하게 화장실로 뛰어간 적도 있다. 하지만 한 번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내가 웃으며 날 타박했고, 어머님은 엷은 미소를 지으셨다. 그 뒤로는 마음 편하게 방귀를 뀌었다.

1월 말 아내는 밥벌이를 위해 글을 썼다. 아이를 보느라 일에 전념할 수 없는 아내는 어머님께 구조신호를 보냈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포항으로 갔고 설 연휴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일이 끝나지 않은 아내를 위해 어머님이 함께 올라오셨다

어머님은 또 뒷바라지를 하셨고, 오늘 포항으로 내려가신다. 어머님이 없었다면, 아내와 나는 참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특히, 아내는 계속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가계부는 마이너스였을 것이다. 주변에 양쪽 어머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부부들이 있다. 얼마나 힘들까.

어머님께 약을 지어드리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오히려 어머님이 아내에게 약을 지어주셨고, 언젠가는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는 나에게 피로회복제를 건네주셨다. 이제는 어머님께 약을 지어드리겠다는 약속을 지켜야겠다. 홀로 지내셨을 아버님께도 말이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이 말을 꼭 해야겠다.

어머님 아버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입니다. 이곳 블로그에 육아일기 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교육 담당 기자로서 혁신학교 등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가 썼던 기획기사 시리즈입니다. 페이스북(http://www.fb.com/justgoworld)을 통해 육아일기와 제가 쓰는 기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제가 쓴 혁신학교를 비롯한 행복한 학교들의 위치와 제가 쓴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goo.gl/2ATYq5


넌 언제 클래?

우리 가족은 한 달만에 다시 뭉쳤다. 설 연휴 때 아내와 아이는 처가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우리 가족, 행복하게 지낼 일만 남았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첫 날, 아내는 일어나지 못했다. 잇몸이 부어, 밥을 먹지 못했다. 같이 올라온 장모님이 해주신 죽을 먹어야 했다.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 두통약을 먹었다. 다행히 모유 수유에 지장이 없는 약이 있었다.

아내의 통증은 갈수록 커졌다. 이튿날 치과에 갔더니,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부은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잇몸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사랑니를 뽑을 수 있다고 했다. 잇몸 치료를 하고 진통제를 먹었지만, 낫지 않았다. 모유수유를 하느라 밤에 잠도 못자는 아내는 치통에 점점 지쳐갔다.

어금니에서 시작된 통증은 앞니까지 번졌고, 급기야 귀까지 아파왔다. 아내의 통증은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병원을 옮기고 약도 바꿔봤지만 듣지 않았다. 아내는 새벽에 몇 번이나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잠을 깼다.

며칠 전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내였다.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치과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너무 아파 항생제를 먹으려고요. 모유수유를 끊어야할 것 같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질금을 먹었어요라며 엉엉 울었다. 질금(엿기름)은 젖을 말리게 한다. 수유를 하지 않으면 젖이 차 아내의 가슴이 붓는다. 아내에게 큰 고통이다. 그래서 아예 젖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도 나도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아내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혼자 잠 못 자고 수유하느라 고생했어요. 80일간 모유수유 한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에요."

"이제야 편해졌잖아요. 젖도 잘 나오고, 아이도 편하게 젖을 빨고. 근데 하필 왜 지금 아파서. 내가 스스로 끊으면 모르겠는데, 오늘 아이한테 충분히 수유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유수유를 못하면, 나쁜 엄마가 되는 시대다. 잠 못 자고 수유를 하느라 아내가 말라가는데도, “힘들면 모유수유 끊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분유값도 아끼고 나도 잠을 푹 잘 수 있다는 얄팍한 마음도 있었다. 아내는 이미 출산 전 몸무게로 돌아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제 더 이상 모유수유를 못해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울컥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아내에게 말했다. “그럼 당신 맥주 먹을 수 있겠네요.” 내 실없는 농담에 아내는 그제야 웃었다.

아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