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만큼 컸구나.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냥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빠들이 품절된 요괴워치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온다. 다행히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이는 요괴워치가 뭔지 모른다.

그렇다고 어린이날이 여전히 그냥 쉬는 날인 건 아니다. 장모님은 아이의 옷과 모자를 준비하셨고, 처형은 친환경 장난감과 옷을 아이 앞으로 보내왔다. 나도 처조카들에게 작은 가방을 준비했는데, 장모님과 처형의 선물에 비하면 약소한 것 같다. 그래도 처조카와 잘 놀아주는 나만큼 좋은 선물이 있을까().

사실 어린이날은 아이가 아닌 아빠들에게 중요한 행사인 것 같다. 바쁜 일상 탓에 아이를 돌보지 못한 아빠들이 많다. 나 또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생각만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요괴워치 소동은 어린이날만큼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발현된 게 아닐까.

4월 중순부터 아이와 떨어져 있었다. 아내와 아이는 처가인 포항에 갔다. 많은 아빠들은 내게 진심으로 부러운 눈빛을 쏘았다. 처음엔 "아이 보고 싶어 죽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가 좋았다. 오랜만에 영화를 봤고, 술 약속도 많이 잡았다. 그래도 아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이날이 낀 황금연휴가 다가왔다. 54일 휴가를 내면 노동절인 51일부터 어린이날까지 긴 연휴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선후배들도 그날 쉬고 싶을 것이다. 51~2일 세월호 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예정돼 있었다. 취재를 자원했다. 밤을 새우는 게 예상됐지만, 54일에 쉬려면 어쩔 수 없다. 새벽 515분 포항행 KTX 첫차를 예매했다. 힘든 밤을 보내면, 이튿날 아침에 아이 앞에 짠 하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유식을 시작한 아이. 맛이 왜이래?

취재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촛불집회 이후 가장 힘든 취재였다.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물대포를 맞았다. 온 몸이 흠뻑 젖었다. 화단 옆에 있었던 탓에 물대포에 의해 튀어 오른 흙을 뒤집어썼다. 캡사이신이 눈과 입에 들어갔다.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5월의 새벽은 쌀쌀하다. 반팔을 입은 데다, 옷이 온통 젖으니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친한 기자의 도움으로 카디건을 빌려 입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날 취재는 해가 뜰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KTX 첫차는 타지 못했다. 뒤이어 오전 710, 840, 945KTX를 예매했다가 취소했다.

낮 기차는 매진이었다. 포항에 있는 아내도 서울 안국동 거리에 있는 나도 코레일 앱을 계속 해서 새로고침했다. 해가 중천에 솟은 뒤에야 취재가 끝났다. 운 좋게 오후 245KTX를 예매할 수 있었다. 집에 가서 씻고 서울역에 가서 KTX에 올랐다.

처가에서 훌쩍 자란 아이를 안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못 본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어, 새벽에 아이가 깨면 내가 일어나겠다고 아내에게 호언장담했다. 이튿날 새벽 피곤에 찌든 난 일어나지 못했다.

연휴 때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봤다. 눈도 초롱초롱하고 코도 오뚝하다. 팔을 잡아주니, 두 발로 제법 버틴다. 어느새 스스로 모로 누울 수 있다. 장모님 말로는 스스로 뒤집었단다. 벌써 이만큼 컸구나.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몇 년 후 어린이날 아침, 아이가 요괴워치보다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다.

헤어짐은 항상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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