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어떻게 키울까. 아빠는 벌써부터 고민이네.

며칠 전, 혁신학교 기획 취재로 부천의 한 초등학교를 찾았다. 4년 전만 해도 죽어가는학교였다. 그땐 주변 어린이집에서 예비 초등학생 학부모에게 자녀를 다른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위장전입을 권했단다. 하지만 몇몇 어머니들은 학교를 바꿔보자며 힘을 모았고, 변화가 시작됐다. 한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4년 전 아이가 이곳에 입학할 때, 놀랐어요. 제가 다니던 30년 전의 학교와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세상은 많이 바뀌었는데...”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만 존중받고, 나머지는 열패감을 맞본다. 하루 종일 조그마한 책상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른인 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뛰어놀아야할 아이들에게 학교와 감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20여 년 전 나의 학창시절도 마찬가지였다.

1991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 왔다.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놀려댔고, 걸상을 던지며 싸웠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 집에서 돈을 받아 학교에 기성회비를 냈다. 하지만 돈이 없어졌다. 선생님은 교실의 모든 학생들 앞에서 나를 의심하며 다그쳤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어떤가. ‘야자때 만화책을 봤다는 이유로 한 시간가량 만화책을 입에 물고 손들고 서있었다. 자습이었던 일본어 수업시간에 다른 과목 교과서를 꺼냈다는 이유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미션 스쿨인 이곳에서 두 번이나 원치 않는 세례를 받았다. 운동장에서 수백여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사랑의 매, 아니 폭력은 얼마나 일상적이었던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5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모교를 찾아본 적 없다. 시간이 흐른 뒤, 학생이 선생님을 폭력행위로 신고해 경찰이 학교로 찾아왔다는 뉴스에서 모교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60일 지났다. 학교에 가는 건 7년 뒤의 일이지만,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 앞선다. 아이를 학원에 안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모두 학원에 가는데, 내 아이만 안 보낼 수 있을까. 학원에 안가는 아이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할까.

얼마 전, 인터넷으로 경기도 양평의 집을 찾아봤다. 단순히 전원생활의 꿈 때문은 아니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가 많다. 아이가 이곳 학교와 자연에서 뛰어놀면, 행복해하지 않을까. 눈 딱 감고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싶다. 하지만 돈 문제도 있고, 서울로의 출퇴근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든 지 오래다. 이 때문에 학교 주변 집값과 전셋값은 치솟았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몇몇 원주민들은 떠나야했다. 새로 지어지는 집 때문에 숲은 파헤쳐졌다. 내 아이를 위한 선택은,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엊그제 한 선생님을 만났다. 혁신학교를 만들고 확신시킨 주역 중 한 사람이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변화시켜요.”

혁신학교의 성공담에는 학부모들이 빠지지 않는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행여 아이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직장 생활이 바쁠 텐데, 그럴 시간이 있을까.

7년 뒤의 일인데, 마치 새달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를 위해 나서볼까?” ‘극성 아빠로의 변신에, 아내는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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