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넓은 집에서 '개구리 점퍼루'를 타렴.

지난 주말 집을 구했다. 집주인과 마주 앉아 전세계약서를 쓰기 직전까지 조마조마 마음을 졸일 만큼, 끝까지 다사다난했다. 가까스로 전세 계약을 했다. 이 과정을 두 편으로 나눠 쓴다. 시간이 지나면 웃으면서 오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마 그땐 다시 전셋집을 구하느라 정신없겠지.

달력을 넘기다 손이 찢어졌어요

어머니가 웃으시며 붕대로 감싸주셨어요

얘야 시간은 날카롭단다

- 조인선 시인의 시 '인터넷 정육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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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퇴근 시간이 가까웠을 때 한 공인중개사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괜찮은 전셋집이 나왔다고 했다. 다소 오래된 빌라지만, 3개의 넓은 집이란다. 전셋값도 방 2개짜리 작은 신축 빌라보다 쌌다. 공인중개사는 전세물건이 뜨자마자 내게 연락했다면서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칼퇴가 가능했다. 아내에게 연락해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보러가기로 했다. 공인중개사와 함께 그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곳에 사는 세입자가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두 팀이 집을 보고 갔고, 우리 다음에 또 한 팀이 온다고 했다. 2년 전 신혼집을 구할 때 괜찮은 전셋집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을 둘러봤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좁았던 탓일까. 집이 꽤 넓어보였다. 부엌과 화장실이 좁았지만, 거실이 잘 빠졌다. 거실 창문을 열자 바로 옆 빌라가 맞닿아있었다. 일조량과 조망권은 포기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또 언제 이만한 전셋집이 나오랴.

난 우리 부부가 마련할 수 있는 돈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완벽한 빌라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내와 함께 부엌 쪽 베란다를 살펴보다가, 아내에게 나직이 일렀다. “집 괜찮은 것 같아요. 계약 합시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부의 결정 장애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졌다.

세입자에게 습기가 차는지, 누수가 있는지, 집주인은 어떤지 등을 꼼꼼하게 캐물었다. 큰 문제는 없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9월 중순에 이사해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그가 답했다.

안돼요. 9월 초순에 이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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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천이 좋아 북가좌동에 신혼집을 차렸지만, 불광천에 가까운 집은 너무 비싸다.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후 공인중개사에게 계약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당장 가계약금을 걸 수 없었다. 먼저 9월 초순에 이 세입자에게 줄 전세금을 마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세자금대출을 최대한도로 빌린다 해도, 나머지 수천만 원은 어디서 빌릴 수 있을까. 쉬 답이 나오지 않았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에게 연락해 전세금을 9월 초순에 미리 빼달라는 부탁을 해보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조급해졌다. 30분만 지체해도 누군가가 이 집을 계약할 것 같았다.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아내가 공인중개사무소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아내가 말했다.

아빠가 해주시겠대요.”

안도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공인중개사무소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장인어른,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세입자 쪽에 연락해 계약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가계약금 100만 원을 넣었다. 9월 초순 전세자금대출과 장인어른께 빌릴 돈으로 전세금을 내고, 9월 중순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으로부터 돌려받을 전세금으로 장인어른께 돈을 갚기로 했다.

뒷날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그때 가계약금을 넣지 않았다면 계약할 수 없었다. 이미 우리 앞에 이 집을 본 한 사람이 맘에 들어 했고, 남편의 늦은 퇴근시간에 맞춰 함께 다시 집을 보기로 했단다. 그나마 칼퇴를 할 수 있었던 우리 부부가 먼저 전셋집을 찜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분들은 우리 때문에 계약을 놓친 셈이다.

참 안타까웠다. 우리나 그분들이나. 그리고 전세난민 모두.

이튿날 오전 은행에서 전세자금대출 상담을 받은 뒤, 그날 저녁 전세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땐 몰랐다. 전세 계약 직전, 집주인이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칠 줄은.

불광역에 붙어 있는 빌라 분양 전단.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일요일 밖에 나왔는데, 집주인 쪽 부동산공인중개사가 전화했다. “손님이 왔는데 빈 집을 봐도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집이 엉망이었다. 지금껏 깨끗하게 청소한 우리 집을 본 사람 중에서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오늘은 기대를 접어야 했다. 심드렁하게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 공인중개사가 다시 전화했다. “계약한대요.”

계약날짜는 두 달 뒤로 정해졌다. 그때까지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한다. 최근 두 달 동안 많은 집들을 봤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아니, 전셋집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냈다. 아내와 함께 은평구 쪽 전셋집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내가 아이를 안았다. 날씨는 후텁지근했고, 아이는 칭얼거렸다. 공인중개사무소 몇 군데에 연락처만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응암역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무소에 들어갔다. 사정을 얘기하자, 어제 나온 전셋집이 있다고 했다. 교통이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나중에 좋은 전셋집이 있으면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려다가, 이왕 온 거 한 번 보기로 했다. 그래야 은평구 쪽 전셋집 시세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한 빌라 앞에 내렸다. 문을 열었더니,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우리 아이와 생일이 비슷해 보였다. 거실에는 우리 집에도 있는 장난감이 눈에 보였다. 우리 부부가 탐내고 있는 위고도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 우리 집이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집은 깨끗하고 넓었다. 맘에 들었다.

이 집을 보고 난 후 내 통장에는 수백만 원이 찍혔다. 현재 집주인이 새 전셋집 계약할 때 계약금으로 쓰라고 전세금의 일부를 보낸 것이다.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은 운때가 맞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치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두 달가량 집을 구했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우리 집이 나간 후, 첫 번째로 찾아간 공인중개사무소에서 본 첫 번째 전셋집이 맘에 들었다. 동시에 집주인은 계약금을 보내왔다.

그날 다른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아 전셋집 몇 군데를 봤지만, 첫 번째 집보다 맘에 드는 곳은 없었다. 아내와 논의 끝에 계약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외식을 하면서 축배를 들자고 했다. 아이를 안고 땡볕에서 집을 구하러 다니던 지난 두 달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내에게 미리 고생했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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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신축 빌라 공사하는 곳이 많다. 하지만 전세는 없다. (사진 속 건물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그날 저녁 집주인이 될 사람 쪽의 공인중개사무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계약할 집의 등기부등본을 봤다. 대출 14000만여 원. 전화로 대출을 다 갚았거나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과 달랐다. 공인중개사 쪽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항의하니, 내가 낼 전세금으로 대출금을 갚으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대출이 없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집이 팔리기 전에는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전세계약 만료일로부터 한 달 보름이 지난 뒤에야 이사를 하게 됐다. 대출이 많이 있는 집을 계약할 경우, 전세금을 받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폭탄이 터졌다. 잠시 외출한 집주인 쪽 공인중개사를 제외한, 우리 쪽 공인중개사, 집주인, 세입자가 될 우리 식구가 마주 앉았다. 우리 쪽 공인중개사가 전세자금대출을 설명하며 전셋값의 5%를 계약금으로 내야 한다고 언급하자, 집주인은 계약금은 10%로 해야 한다면서 불같이 화를 내고는 중개사무소를 나가버렸다.

아내는 내 팔을 잡으면서 불안해했다. 우리 쪽 공인중개사는 불안하면 계약하지 말자고 했다. 계약을 포기했다. 집으로 가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허망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서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힘을 냈다. 아이는 엄마 아빠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집에 갈 때까지 잘 안겨 있었다그날 밤 아내와 맥주 한 잔 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괜찮은 집, 나타나지 않겠어요?” 다소 우울할 때 힘이 되는 시를 소개한다.


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황인숙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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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옥상에서 찍은 빌라들. 우린 어떤 집을 구하게 될까?

미친 척 하고 대출 많이 당겨서, 집 사요.” 아내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부동산 담당 기자였던 몇 년 전,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을 펴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전셋집을 구하면서 빚내서 집사는 건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살고 있는 빌라 5층의 작은 신혼집 역시 최대한 빚을 내지 않기 위해 골랐다. 아내도 나도, 착실히 돈 모아서 나중에 번듯한 집으로 이사 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빚내서 집사자는 생각도 마다 않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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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집의 전세 계약 만료는 8월 초다. 집주인이 비싸게 전세를 내놓은 탓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기미가 없었다. 최근 집주인은 집을 팔겠다고 했다. 전세 계약이 끝난 뒤에도 두 달 안에 집을 꼭 팔겠다고 했다. 해석을 하자면, 당장 전세금을 못 준다는 뜻이다. 법은 멀리 있다. 집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가을이면 전세 매물이 많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일주일 전 한 남자가 우리 집을 보러 왔다.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8월 중순에 이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흘러 넘겼다. 설마 이 집이 나갈까 싶었다. 집 주인은 시세보다 비싸게 내놓았다. 혹시 몰라 부동산 중개업소에 연락을 했다. 집을 보러왔던 사람이 대출 관계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계약이 이뤄진다면, 불과 한 달 보름 안에 이사를 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부랴부랴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북가좌동에는 전셋집 씨가 말랐다. 인근 성산동 쪽의 전셋집을 알아봤지만, 북가좌동보다 비싼 터라 맘에 들지 않았다.

토요일, 아내와 나는 각각 북가좌동과 우이동에서 집중적으로 전셋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우이동은 처형이 사는 곳으로, 아내에겐 2의 친정이다. 아내가 먼저 움직였다. 곧 아내로부터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신축 빌라 내부를 꼼꼼하게 보여줬다. 후에 아내에게 물었다. “왜 전셋집이 아니라, 신축빌라를 봤어요?” 아내의 대답은 간단했다. “전셋집이 없었으니까요.”

북가좌동에도 우리가 원하는 전셋집이 없었다.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다. 눈높이를 많이 낮추거나 아니면 많이 높이거나. 반전세나 월세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가 아니라면, 적잖은 부담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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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어딨니?

일요일 아이를 안고 집밖으로 나섰다. 부동산 중개업소가 문을 닫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집에 앉아서 걱정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를 걷다보니, ‘분양사무소라는 펼침막이 눈에 보였다. 신축 빌라였다.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겠지만, 몇 분을 그 앞에서 서성였다. 결국 펼침막에 나온 번호로 전화를 했고, 곧 신축 빌라 1층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나왔다.

‘OO주택 이사라고 적힌 명함을 건네받았다. 북가좌동에 빌라 여러 곳을 분양한다고 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차에 탔다. 한 신축 빌라에 내렸다. 알고 보니,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걸어서 3분 거리였다. 이곳 4층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감탄사를 내지를 뻔했다. 말 그대로 새 집이었다. 남향이었고, 전망도 괜찮았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 함께 둘러본 아내도 나쁘지 않은 눈치다. 헌데, 아저씨는 알고 보니 집이 나갔다고 했다. 작전인지,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신축 빌라 몇 군데를 더 보여줬다. 어떤 곳은 빛이 잘 안 들어왔고, 어떤 곳은 비쌌지만, 하나 같이 살고 싶을 만큼 깨끗한 새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오래 살 거라면, 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셋집은 없고, 대출 이자는 싸다. 집값도 전셋값과 큰 차이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2년 마다 이 난리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물론, 우리 부부도 어지간하면 빌라를 사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집값은 떨어지고, 팔려고 할 때 제때 팔리지 않는다는 말. 또한 빚은 싫다. 작은 집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돈을 모아 좋은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 부부에게 그걸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 ​​​​

- 김기택 시인의 시 '우산을 잃어버리다' 중에서

이제 장마다. 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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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해준 이유식, 맛있니?

아내가 고구마밥을 했다. 아내가 그릇에 고구마가 잔뜩 담긴 밥을 펐다. 쌀밥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황금빛 고구마 조각!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런데, 아내는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외면하고 고구마를 다시 밥솥에 던다. “왜 그래요?”, “아이 줄 거예요.”

그렇다. 이제 고구마도 아이 먼저다. 장인 어른이 며칠 전 사과 한 박스를 보내셨다. 아이가 제일 먼저 맛봤다. 그 전에 장모님께서 고기 좋아하는 사위를 위해 올려보낸 스테이크용 쇠고기 안심도 어느새 아이 이유식 거리가 됐다. 그나마 이유식을 하고 남은 사과와 쇠고기 정도를 맛볼 수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는 며칠에 한 번씩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아이 이유식을 만드는 소리다. 이제 먹을거리를 아이에게 양보하는 것을 넘어,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어 떠먹여줘야 한다. 끙! 상전이 따로 없다!

이유식을 만드는 것은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결혼하면서 난 요리하는 남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출근하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퇴근 뒤 아내가 준비한 저녁을 먹는다. 염치없는 남편은 주말에 가끔 음식을 한다. 그것도 고작 파스타. 지난 주말엔 인터넷을 뒤져 굴 소스를 넣은 두부파프리카볶음을 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 아내가 부엌에서 이유식을 만드느라 낑낑대고 있을 때난 피곤하다를 외치며 안방에 늘어져 있었다아내가 S.O.S를 칠 때야 부엌으로 갔다. 이유식을 만드는 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우리 아이 밥인데...'

얼마 전, 아내에게 속죄의 의미로 나 혼자 이유식을 만들겠다고 했다. 메뉴는 아내가 정했다. 달력에 적힌 이유식 식단표를 본 뒤, 브로콜리와 쇠고기를 내어왔다.

정성스럽게 쓱쓱. 손은 덜덜.

브로콜리를 씻고, 줄기를 뜯은 다음 잘게 다졌다.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니 느리다. 고기도 잘게 자른다. 아이가 먹기 힘든 질긴 힘줄을 빼낸다. 허리를 굽힌 채 칼질한 지 20, 허리가 아파왔다. 쌀죽을 끓이고, 여기에 쇠고기를 분쇄기로 갈아 넣고, 마지막에 브로콜리를 넣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죽을 저었다. 이유식 세 끼 분량이 나왔다. 만드는 데 30. 허리가 쑤셨다. ‘이제 끝났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아내는 내 앞으로 당근을 내놓았다. 내 입에서 "아이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유식을 모두 만든 후, 방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내가 만든 이유식을 아이가 먹는 상상을 하니,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다. 이튿날 회사에 간 나를 대신에 아내는 내가 만든 이유식을 아이에게 먹였다. 한 그릇 잘 비웠단다. 뿌듯했다. 주말에는 꼭 내가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였다. 잘 먹는 아이가 대견했다.

아이 입 속으로 이유식을 밀어 넣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아이 스스로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겠지. 그땐 아이와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나와 아이는 언제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난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부모님과 함께 밥상에 앉지 못했다. 맨날 늦잠 잔 탓에 아침을 먹지 못했다. 부모님은 항상 밤늦도록 일을 하셨고, 고등학생이 된 나도 늦은 밤에야 집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가 서로에게 어땠는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방에서 잠들었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부모님이 새벽까지 호프집이나 노래방을 운영하면서, 우리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아쉽다. 그래서인지 난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밥상에 둘러앉아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며 즐겁게 밥을 먹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허투루 하는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책을 읽다가 이 시가 눈에 띄었나 보다.


끼니 / 고운기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문법(問法)은 아니지

차라리 못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 먹고 들을 나가

날라 오는 새참이며 점심 바구니

끼니마다 집에서 만든 밥 먹던 생각

그것이 힘의 원천

저녁이면 큰 상 작은 상

각기 제 몫의 상에 앉아

제 밥그릇 찾아먹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

무슨 벼슬한다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며

제 그릇 하나 찾아먹지 못하고 사노

먹는 게 아니라 때우면서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나

멀쩡한 제집 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면서

 

-고운기 시집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창비, 2001)


우리 집 아침 풍경. 아이가 늦잠 자는 아빠를 깨운다.

집주인이 우리 세 식구가 살고 있는 전셋집을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놓은 지 한 달 가까이 됐다. 지금까지 전셋집을 보러온 사람은 단 한 명이다.

2주 전의 일이다. 아내가 아이와 씨름하고 있던 평일 낮,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부동산 중개업자와 함께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시큰둥한 표정을 한 아주머니는 집을 휙 둘러보더니, 집이 아닌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다. "아기 냄새가 나네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1분 남짓 되는 시간이었단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에 집을 보러온 사람은 없었다.

전세 계약 만료는 두 달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전셋집은 나가지 않고 있다. 집주인 쪽 부동산 중개업자는 "요즘 전세가 없어서, 집이 금방 나갈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집주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셋값보다 3000만 원 더 비싸게 내놓았다. 주변 시세와 비교하면, 비싼 편인 것 같다. 전셋값을 내리지 않는 이상, 이 집에 살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 세 식구의 새로운 보금자리 구하기는 잠시 미뤄졌다. 그렇게 답답한 시간을 보내던 며칠 전, 내 휴대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주인이었다. 지금까지 부동산 중개업자를 사이에 두고 소통을 해왔기 때문에, 사실상 집주인과 하는 첫 통화였다. 다소 긴장됐다.

집주인은 빚내서 집을 샀는데, 집값이 오르지 않아서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셨군요따위의 추임새를 넣었다. 방심하던 차에 뭔가 훅 들어왔다. 집주인의 말이다.

"집을 팔려고 합니다."

전셋집도 안 나가는 마당에, 집을 판다니. 조짐이 좋지 않다. 빚이 있다는 넋두리와 비교적 비싼 전셋값을 감안하면, 집주인이 비싸게 집을 내놓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두 번째 훅이 들어왔다.

"집은 팔릴 겁니다. 다만, 혹시라도 집이 전세 계약 만료 전에 안 팔릴 수도 있어요. 그럴 땐 내가 두 달의 여유를 줄 수 있어요."

두 달의 여유? 무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주인이 말하는 여유는 우리 세 식구에게는 달가운 말이 아니었다. 계약 만료 이후 두 달 더 살게 해주겠다는 건데, 그 기간 동안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전셋집은 좁고, 5층인 탓에 아내가 무척 힘들어한다. 우린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선생님께서는 여유라고 말씀하시는데, 저희에게는 여유가 아니에요. 저희는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8월 초 전에 이사를 가는 게 목표거든요."

계약이 만료되는 즉시 전세금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바로 하지 못하고, 에둘러 표현했다. 집주인은 내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몇 번이나 그러니까 두 달의 여유를 준다고요라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바로 꺼내는 건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 선생님이 집을 팔기로 했다는 것만 들은 걸로 할게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희 전세 계약 만료 전에 집이 팔리거라 믿어요. 혹시라도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예상되면, 그때 가서 논의하시죠."

곧 전화를 끊었다. 복잡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아내와 통화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어서 빨리 집이 팔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쉽지 않은 이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태어난 지 6개월, 아이는 제 힘으로 몸을 뒤집을 수 있다.


지난 월요일은 아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문화센터(문센)에 처음 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조리원 동기(이른바 조동아리) 엄마들을 만난다며 들떠있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아내에게 문센과 같은 바깥나들이는 잠깐이지만 숨 쉴 여유를 갖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출근하면서 달뜬 아내에게 문센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며 집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하고 얼마 뒤 아내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문센 가도 될까?” 난 아무 생각 없이 다녀오라고 했다. 아내는 메르스 때문에 취소하는 사람이 많다며 걱정했지만, 난 계속 괜찮을 것 같다고 답했다. 아내는 결국 문센에 가지 않았다.

내가 아픈 건 괜찮아도 아이가 아프면...”

이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메르스 확진 환자가 십 수 명에 불과했다. 메르스에 걸릴 확률은 교통사고가 발생할 확률보다 적다. 설마 나에게도 그런 불행이 찾아올까. 널리 퍼지고 있는 유언비어가 괜한 공포심을 조장한다고 생각했다. 보건 당국이 잘 대처할거라 믿었다. 아니, 태어난 지 6개월도 안된 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보건 당국을 믿어야 했다.

오늘 아침 아내가 다급하게 날 깨웠다. 메르스로 인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내보였다. 아내의 불안은 커졌다. 장모님도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말라며 포항에서 걱정스러운 메시지를 보내셨다. 하지만 내게 메르스는 여전히 남의 일이었다.

오늘 하루 휴가를 내고 아이를 돌봤다. 육아 탓에 손목이 아픈 아내에게 하루라도 육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오전에 아이와 씨름을 하니, 지쳤다. 답답하기도 했다. 아이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잠깐 밖에 나갔다. 아내는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느냐며 걱정했지만, 아이가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한다는 논리를 폈다. 집밖에 나서니, 왠지 거리를 한산해보였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괜히 고집을 피운 것 같아, 아이에게 미안했다.

5년 전 신종 플루가 유행했을 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때도 설마 나도 걸릴까라고 생각했다. 메르스에 대한 생각도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르다. 그때는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내가 졌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잘못 탓에 행여 아이가, 내 가족이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나 때문에 아이가 아프면 안 될 일이다. 아내는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야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로서, 참 갈 길이 멀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재운 후, 메르스 관련 뉴스를 찾아봤다. 보건당국의 대처가 허술했다. 지금까지도 보건당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고 곧 메르스를 통제 하에 둘 것으로 믿지만, 불안감도 느낀다. 정부가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병원 명단은 카카오톡 등을 통해 여러 건 받았다. 당국의 우왕좌왕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중동여행 시 낙타와 밀접한 접촉을 피하세요라는 보건당국의 예방법은 불안감을 줄이지 못했다.

아내는 내게 마스크를 건넸다. 얼마 전 황사 대비 마스크를 산 기억이 났다. 아내는 내일 사람 많은 곳을 다닐 때 마스크를 쓰라고 했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아내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한 마디를 보탰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스크를 써요.” 

아차 싶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마스크를 써야겠다.

아이의 성장과 맞바꾼 아내의 손목

아내는 오래 전부터 오른쪽 손목이 아프다고 했다. 하루 종일 아이를 업고 안으니 당연히 손목에 무리가 갔다. 특히, 아이가 또래 평균보다 잘 자란 덕에 아내의 손목은 다른 엄마들보다 더 나빠졌을 것이다.

최근에는 손목을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다. 여기에 "몸 성한 데가 없으니, 장모님께 반품 요청을 해야겠다"며 농담을 했다. 그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 부부를 잘 아는 한 선배가 내게 자주 하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이 한심한 놈아.'

상황 파악이 느린 남편은 아내에게 “내가 하루 휴가를 낼 테니병원에 가서 치료 받도록 해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며칠 지나면 다시 좋아지겠지’란 생각이 컸다. 아내는 무심한 남편을 고른 탓에, 손목이 망가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저께 아내는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내가 점심시간에 아이를 맡아주면 그 시간에 병원에 갈 계획을 내놓았다. 나더러 점심을 먹지 말고 회사 근처 병원 앞으로 나와 달라고 했다. 순간 망설였다. 이튿날 아침 눈치 빠른 아내는 “일하는데 민폐를 끼치는 거 같다”며 내 점심 도시락을 쌌다. 눈치 없는 남편은 그저 좋아라 했다.

내가 출근한 뒤, 아내는 끙끙 앓았던 모양이다. 아내는 내 퇴근길에 맞춰, 아이를 안고 회사 앞으로 왔다. 함께 병원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은 뒤 진료실에 들어간 아내는 5분 뒤 손목에 반깁스를 한 채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오히려 아내는 발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깁스를 한 팔을 내보였다. 

인대가 늘어나고, 염증이 많이 생겼대요. 다른 사람들보다 상태가 심각해서, 주사를 세 번이나 맞았어요. 이제 아이 못 안으니, 당신이 안아요. 하하”

아내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울상이 아니라 마음이 놓였다. 아내는 곧 "배가 고프다"고 했다. 아내도 나만큼이나 허한 걸 싫어한다. 미안한 마음을 전할 새도 없이, 식당가로 갔다. 아내는 말했다.

"집밥 말고 아무거나 다 좋아요. 내가 만든 건 빼고 다 맛있어요."

피자를 먹으면서 우리는 앞으로를 고민했다. 깁스한 손으로 나이프를 들고 낑낑대며 피자를 자르고 있던 아내에게 "휴가를 쓸까?"라고 물었다. 오늘과 내일 내가 출근하면, 아내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내는 선택을 내게 미뤘다. '전날 밤 갑자기 휴가 쓴다고 말하기가 좀 그런데...' 

1시간 뒤, 아내의 손목 깁스 사실을 안 장모님은 당장 포항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시겠다고 했다. 헉. 급하게 팀장에게 연락했고, 결국 오늘과 내일 휴가를 쓰기로 했다. 휴가 이틀과 석가탄신일 연휴 3일을 합쳐 5일 동안 내가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도맡아 하기로 했다. 

아내에게는 5일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 "육아를 내게 맡기고, 푹 쉬어요." 아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카페라떼를 사서 건넸다. 손목 깁스한 걸 빼면, 오랜만에 외식을 하고 스타벅스 카페라떼를 마신 아내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집에 와서 <무한도전> 재방송을 틀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육아 때문에 제대로 <무한도전>을 보지 못했던 아내는 시종일관 껄껄 웃었다. 연휴 전야, 아내는 웃으면서 잠들었다. 지인들에게는 "혼자 육아한듯 반깁스했다ㅋ 뭉쳐요 뭉쳐"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라도 아내에게 육아에서 벗어날 시간을 줄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어서 아내의 손목이 낫길 빈다. 내가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아이가 넓은 집에서 쏘서를 타게 해주고 싶다.

몇 달째 미루고 있는 일이 있다. 집 주인에게 이사 간다고 말하기.

세입자로서 집주인에게 전화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해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우리 부부는 5만 원을 내고 수리를 받았다. 집주인에게 말해 돈을 받아야 했지만, 전화하는 걸 미루다 결국 전화하지 못했다. 참 소심한 부부다. 오는 8월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살고 있는 집은 신혼집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할 때 최대한 빚을 내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돈 모아 넓은 집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언덕에 있는 5층 빌라 꼭대기 층을 얻었다. 깨소금 볶는 신혼생활이니, 5층을 오르내리는 건 힘들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상황이 바뀌었다. 아내는 몸무게 8kg를 웃도는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마다 힘들어했다. 유모차를 반지하 공용공간에 내려놨다. 먼지가 쌓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부부는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내가 집주인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거다. 계약이 만료되는 여름에는 전세물량이 많지 않다 하니, 미리 연락을 해야 했다. 지난달 아내가 걱정하자, 집주인에게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노트북에 원고를 썼다.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니다. 계약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에게 재계약 여부를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주위에서나 뉴스에서나 전세금 문제로 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을 많이 봐와서 일까. 단어 사용 하나에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전화하지 못했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포항에 내려가야 하는 상황과 겹쳤다. 빈 집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게 마뜩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내는 이번 주에 주인에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아니, 통보했다. ‘그래, 더 이상 내 귀차니즘을 용인할 수 없겠지.’ ‘지금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안하고 싶다가 내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전화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어떻게 전화할까 전전긍긍하던 차, 어제 공인중개업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계속 사는지 이사하는지, 주인이 물어보라고 하던데요.”

이렇게 반가운 전화가 있을 수 있을까. 체증이 한 번에 가신 듯했다.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고 이사를 간다고 말했다. 다음 주부터 집을 보러 와도 된다고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우리 집, 잘 나갈까요?”

이 집을 구할 때, 우리 집은 그때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집이었다. 아마 언덕 위 5층 집이라 그랬던 것 같다.

걱정 마세요. 전세가 귀하잖아요.”

마음이 놓였다. 전세금을 못 받을 일은 없겠구나. , 잠깐. 우리 세 식구의 새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중개업자에게 전세 매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 집보다 5000만 원을 올려 14000만 원가량 되는 전셋집이면 좋겠다고 했다. 대출 이자 부담이 컸지만 아이가 태어나니 집을 넓히지 않을 수 없다. 평지에 있는 저층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건넸다.

바로 그런 집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불광천 옆 버스 종점 근처란다. ‘시끄럽고 매연 때문에 아이한테 별로 안 좋을 텐데’, ‘불광천 근처면 자전거 타기 좋겠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뒤 이어 충격을 가한 한마디.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한두 (3.3~6.6)가량 클 거예요. 거실이 없어요.”

언덕 위 빌라 5층에서 평지로 내려간다는 걸 감안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5000만 원을 더 내더라도 고작 한두 평 큰 집에나 갈 수 있다니... 앞이 깜깜했다. 그날 우리 부부는 한숨 섞인 저녁을 보냈다. 아내는 말했다.

이 동네에서 평지로 가는 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너무 오동통한 꿈을 꾸는 건가요? 동네를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 세 식구는 어떤 집에서 살게 될까. 그래도 좋은 집을 구할 수 있겠지?

전셋집을 구할 때까지 종종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모든 전세 난민, 홧팅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국민 애벌레의 서식지.

꺼낼까 말까. 벌써 며칠째 같은 고민이다. 베란다 한 쪽에 놓인 베이스기타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는 거참, 시답잖은 고민이네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꺼낼까 말까에 이어지는 생각의 연결고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육아에 전념해야할 초보아빠가 취미를 가져도 될까?

결혼 전, 내게 세 가지 취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전거 타기다. 주말에 자전거를 자주 탔다. 한강을 달리면 스트레스가 풀렸다. 한강에서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차리자고 아내에게 보챈 것도 그 때문이다. 앞으로 아이를 자전거 뒤 트레일러에 태우고 한강에 가는 게 아빠로서 가장 큰 소망이다.

결혼한 뒤, 아내와 난 커플 자전거를 장만했다. 하지만 몇 번 타지 못했다. 아내가 임신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내를 두고 혼자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간 적이 있다. 그날은 유난히 집안에 있는 게 답답했다. 며칠 뒤, 나와 아내 둘 모두를 알고 있는 한 선배는 내게 말했다. “, 이 한심한 놈아.”

난 사내 야구팀 소속이다. 운동신경은 제로였지만, 감독님의 입단 권유에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맙소사, 정말이지 내가 제일 못할 줄은 몰랐다. 내가 던진 공이 어디로 향할지 모를 정도니. 그래도 함께 땀 흘리고, 훈련 후 생맥주를 마시는 일은 무척 즐겁다.

올해 감독님께 열심히 야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를 두고 야구하러 나갈 수 없었다. 올해 한 번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그래도 몇 년 뒤 아이와 함께 나갈 날을 꿈꾼다. 아이와의 캐치볼이 기대된다. 잘못 던지지 않을까 조금 긴장되기도 한다.

한강에서 너와 공을 주고 받는 날이 올까.

마지막으로 베이스기타 연주가 취미다. 학창시절 음악적 재능이 전무함을 깨달은 뒤, 악기를 다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흥겨운 밴드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후 뜻 맞는 후배들과 의기투합했다. 밴드를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놀라운 일이다.

가끔씩 주말에 신촌과 낙원상가 연습실에 모였다. 합이 맞는 날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우린 연말 공연을 꿈꿨지만, 이루지는 못했다. 난 아이를 낳았고, 다른 멤버들도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다들 바빴다.

베이스가 베란다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해 아내가 임신한 이후 아이 짐이 하나 둘 늘었다. 공간은 비좁은데, 내게서 멀어진 베이스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 칠거면, 치워 달라는 아내의 말에 순순히 베이스를 베란다로 옮겼다. 육아에는 베이스가 필요하지 않았다. 베이스를 팔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얼마 전 밴드 멤버들과 우연히 사무실에서 만났고, 몇 분 만에 다시 뭉치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이가 잠든 밤 9시 이후에 한 시간씩 베이스를 연습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5월 중순 밴드 멤버들과 주말 연습날짜를 잡았다. 아내는 흔쾌히 허락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미안함이 앞선다. 아내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취미생활은 물론 친구조차 잘 만나지 못한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 아닐까. 베이스를 꺼낼까 말까. 며칠째 고민이다.

벌써 이만큼 컸구나.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냥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빠들이 품절된 요괴워치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온다. 다행히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이는 요괴워치가 뭔지 모른다.

그렇다고 어린이날이 여전히 그냥 쉬는 날인 건 아니다. 장모님은 아이의 옷과 모자를 준비하셨고, 처형은 친환경 장난감과 옷을 아이 앞으로 보내왔다. 나도 처조카들에게 작은 가방을 준비했는데, 장모님과 처형의 선물에 비하면 약소한 것 같다. 그래도 처조카와 잘 놀아주는 나만큼 좋은 선물이 있을까().

사실 어린이날은 아이가 아닌 아빠들에게 중요한 행사인 것 같다. 바쁜 일상 탓에 아이를 돌보지 못한 아빠들이 많다. 나 또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생각만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요괴워치 소동은 어린이날만큼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발현된 게 아닐까.

4월 중순부터 아이와 떨어져 있었다. 아내와 아이는 처가인 포항에 갔다. 많은 아빠들은 내게 진심으로 부러운 눈빛을 쏘았다. 처음엔 "아이 보고 싶어 죽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가 좋았다. 오랜만에 영화를 봤고, 술 약속도 많이 잡았다. 그래도 아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이날이 낀 황금연휴가 다가왔다. 54일 휴가를 내면 노동절인 51일부터 어린이날까지 긴 연휴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선후배들도 그날 쉬고 싶을 것이다. 51~2일 세월호 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예정돼 있었다. 취재를 자원했다. 밤을 새우는 게 예상됐지만, 54일에 쉬려면 어쩔 수 없다. 새벽 515분 포항행 KTX 첫차를 예매했다. 힘든 밤을 보내면, 이튿날 아침에 아이 앞에 짠 하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유식을 시작한 아이. 맛이 왜이래?

취재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촛불집회 이후 가장 힘든 취재였다.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물대포를 맞았다. 온 몸이 흠뻑 젖었다. 화단 옆에 있었던 탓에 물대포에 의해 튀어 오른 흙을 뒤집어썼다. 캡사이신이 눈과 입에 들어갔다.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5월의 새벽은 쌀쌀하다. 반팔을 입은 데다, 옷이 온통 젖으니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친한 기자의 도움으로 카디건을 빌려 입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날 취재는 해가 뜰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KTX 첫차는 타지 못했다. 뒤이어 오전 710, 840, 945KTX를 예매했다가 취소했다.

낮 기차는 매진이었다. 포항에 있는 아내도 서울 안국동 거리에 있는 나도 코레일 앱을 계속 해서 새로고침했다. 해가 중천에 솟은 뒤에야 취재가 끝났다. 운 좋게 오후 245KTX를 예매할 수 있었다. 집에 가서 씻고 서울역에 가서 KTX에 올랐다.

처가에서 훌쩍 자란 아이를 안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못 본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어, 새벽에 아이가 깨면 내가 일어나겠다고 아내에게 호언장담했다. 이튿날 새벽 피곤에 찌든 난 일어나지 못했다.

연휴 때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봤다. 눈도 초롱초롱하고 코도 오뚝하다. 팔을 잡아주니, 두 발로 제법 버틴다. 어느새 스스로 모로 누울 수 있다. 장모님 말로는 스스로 뒤집었단다. 벌써 이만큼 컸구나.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몇 년 후 어린이날 아침, 아이가 요괴워치보다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다.

헤어짐은 항상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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