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외할아버지가 아이를 꼭 안고 있다.

아이의 엄마가 쓴 글입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젖 물리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유축이나 분유에 익숙해진 아이는 억지로 젖을 물리려는 초보 엄마의 고집에 눈물 콧물을 짜며 세상 떠나가라 울음을 터트렸다.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어찌할 바 모르던 나는 식은땀을 연신 흘려댔다. 그렇게 나는 갓난쟁이와 모유수유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같던 5~6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이는 엄마의 젖을 물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빠가 다 큰 딸아이와 핏덩이 손주의 사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민망한 듯 씨익 웃고는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와 함께 마트에 갔다. 급하게 친정으로 오느라 챙겨오지 못한 유아용품을 사기 위해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마트로 향하던 그때, 무심한 듯 꺼낸 아빠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가 봄이에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

나는 어떤 말로 대화를 이어가야할지 몰라 "…" 하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깐 나의 할머니는 아빠가 돌 무렵 돌아가셨다. 아빠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핏덩이를 업은 채 피난길에 올랐다.

폐가에, 들에, 산에 몸을 숨기며 이어져간 피난길에서 독사는 할머니의 다리를 물었다. 인민군 군의관의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독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다리만 잘라냈어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리를 자르는 대신 결국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독이 퍼진 할머니의 젖을 먹었던 아빠는 오른쪽 눈의 시력이 온전치 못하다.

"아빠가 그때 딱 봄이 정도 됐을 때잖아. 봄이를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 저 핏덩이를 두고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거라…"

어릴 적 시골 어르신들은 아빠를 조금 다르게 불렀다. 아빠의 이름 앞에는 늘 꾸밈말이 붙었다. “불쌍한 여우.” 경상도 어르신들은 영우여우라 부르셨고, 그 이름 앞에는 늘 불쌍한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었다. 마치 불쌍한 여우라는 말이 고유명사인 듯, 아빠는 그렇게 불렸다.

돌도 되기 전에 엄마를 잃은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엄마 젖을 물어야 하는 갓난쟁이가 안쓰러웠을 게다.

30년 넘게 들어온 어르신들의 불쌍한 여우가 마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르게 들렸다. 나에겐 늘 아빠였던 남자가 봄이처럼 갓난쟁이일 때도,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도 있었다는 걸 잊고 살았다. 아빠는 참 외로웠고, 엄마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젖을 직접 빨지 못해 안쓰러웠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며 자책도 했다. 모유를 유축해 먹여도 되고 분유를 먹여도 되는 데 말이다. 그냥 나의 잘못으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 같고, 직접 수유를 하지 않으면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죽하셨을까. 스물여덟. 젊다 못해 어린 엄마는 독이 퍼진 상태에서도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갓난쟁이 아이가 피난길에 먹을 수 있는 건 엄마의 젖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마트에 다녀온 후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엄마 아빠가 아닌, 갓난쟁이의 엄마 아빠, 사춘기의 엄마 아빠, 20대의 엄마 아빠를 떠올려본다. 내 엄마 아빠가 아닌 그냥 이영우, 김순분을.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인 엄마 아빠를.

빛나던 두 분의 젊은 날을 담보로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그리고 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보고 있으니 '엄마 아빠도 나를 키우느라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큼 엄마 아빠도 '보호받고 싶겠구나' 싶다. 이제야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송구스럽다.

- 2015. 1. 31 늦은 밤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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